나의 인문학 칼럼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不過一枝)

홍영수 시인(jisrak) 2023. 2. 2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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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추구한다. 돈과 명예, 권력, 장수 등등.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이란 유한한 것이기에 삶의 무한함이란 없다. 그런데도 천년 백 년 살 것처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유적인 삶보다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의문과 질문을 품은 존재적 삶이 필요하다.

 

산을 오르거나 숲길을 걸을 때, 가끔 새의 둥지를 본다. 특히, 작은 새들은 자그마한 나뭇가지, 또는 대숲의 작은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부화시켜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할 때면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온 요 임금과 허유의 얘기가 떠오른다.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할 때, 허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짓고 살 때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황하黃河의 물을 마실 때 자기 배를 채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돌아가 쉬십시오, 임금이시여나는 천하를 가지고 할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名者實之賓也이니 吾將爲賓乎鷦鷯巢於深林不過一枝하며 偃鼠飮河不過滿腹이니 歸休乎君予無所用天下爲호리라)

 

얼마나 구애됨이 없고 유유자적한 은일자隱逸者다운 삶의 방식인가. 장자는 요 임금과 은자인 허유를 내세워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 나라 다스리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우고 있다. 비슷한 예로 장자의 양생주養生主에서도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 연못가의 꿩이 되겠다.” 했듯이 뱁새는 숲을 소유하지 않고 오직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고, 두더지도 황하 같은 큰 강의 많은 물이 필요한 게 아니라 타는 목마름을 해소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럴진대 무슨 천하가 필요하고 황하강물이 필요하겠는가. 숲길을 미음완보微吟緩步하며 천하에 속박과 구애됨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이와 비슷한 예를 견유학파인 디오게네스의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어느 날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무엇이든 바라는 것 있으면 나에게 말하시오.”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주시오.”라고 했다. 이때 대왕이 하는 말이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했다.

 

()같은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犬儒學派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당대 시대의 권위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또한 모든 것에 시니컬했으며 무소유의 삶을 추구했다. 견유학파는 시니시즘적인 학파이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만큼 가졌다고 한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성취감과는 다른 것 같다. 작고, 적은 것에서 오히려 충만한 행복을 느끼는 자들이 아닌가 한다. 소위 내적 충만감이나, 내면적 만족감이 아닐까. 요 임금과 허유, 알렉산드로스와 디오게네스의 동서양을 초월한 일화에서 일맥상통한 무소유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허유는 자신을 장식할 그 어떤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명예는 실체에 깃든 손님이라고 했고(實之賓)이라 하면서 임금께 돌아가 쉬세요.” 하는 것과 대왕이 그 어떤 부탁도 다 들어준다는데 햇빛이나 가리지 마십시오.”라고 했던 디오게네스를 생각할 때, 지금처럼 혼란한 사회, 남을 뒤에 서게 하고, 자기만을 앞세우면서 권력을 잡으면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별짓을 다 하고, 온갖 술수를 써가며 아우성치는 현실을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허유와 개()철학자 디오게네스를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의 세태를 보면, 한없는 욕구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로 헐뜯고 중상모략하면서도 하등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또한 그 어떤 두려움도 양심도 없이 언제 그랬냐, 뭐가 잘못된 것이냐 하면서 살아간다. 특히 위정자랍시고 방송이나 지면에 수시로 드러내는 얼굴들, 그들의 내면을 까발리는 가면극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물론 사람은 욕망의 동물이다. 그렇기에 권력과 명예와 부를 탐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러한 외물 때문에 자신의 본성이 바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본성이 바뀌면 몸을 해치게 되고 그러면 영혼과 육체가 시들어가고 죽어간다. 비록 천하제일의 갑부이고 명예와 권력 또한 하늘처럼 높을지라도 그것은 한낱 十日紅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알고, 멈추지 않는 발걸음을 멈춰야 하고,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을 낮춰야 한다. 그래서 참다움을 지켜야 한다. 나뭇가지 하나에 둥지를 틀면서도 만족하는 뱁새처럼, 황하의 물을 마실지라도 오직 배만 채우는 두더지처럼 말이다.

 

이태백은 어느 봄날, 복숭아꽃이 활짝 핀 정원에서 즐겁게 노닐다가 시(춘야도리원서春夜桃李園序) 한 수 읊조렸다. ‘부천지자 만물지역려(夫天地者 萬物之逆旅) 광음자 백대지과객(光陰者 百代之過客)’ 무릇天地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히 지나가는 길손이다우리네 인생, 잠깐 머물다 그냥 가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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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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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홍영수 2010/09/23. 시골 담장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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