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인문학 칼럼

조각보, 대동의 미학

홍영수 시인(jisrak) 2022. 9. 29. 21:48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도가(道家)는 노장(老莊), 유가(儒家)는 공맹(孔孟) 등으로 일반화시킨다. 이 말인즉슨, 그 틀 안에서만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틀 안에 사상과 이념, 철학적 사고를 가둔다면, 그 순간 억압적 수단에 얽매여 창조의 생명력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다양성의 차이에서 오는 독창성과 독자성, 그리고 확장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일반적 관점이 아닌 다른 시각과 시선으로 필자는 조각보를 바라보았다. 어렸을 적 보았던 조각보  인사동 가게에 걸려 있는, 판화처럼 찍어내는 듯한 조각보가 아닌  에서 가위질에 잘리고 버려져서 ()하게 된 천 쪼가리에 유난히 촉수가 닿았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구성원 중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하층민,  민초民草들의 삶이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난, 오방색으로 복을 짓는 조각보 고유의 전통미와 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전통 계승의 위대함과 예술적 가치를 너무나 흔하게 서양의 추상미술 특히, 몬드리안이나 클레 작품들과 비교를 하는 천편일률적인 동일성의 사유와 결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다른 시각으로버려진 천속에서 메타포를 찾아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조각보는 새 옷을 깁고 난 뒤 남은 천 쪼가리와 또는 헌 옷가지들의 자투리들을 모아 만든다. 버려진 것은 버려진 것끼리, 그래서 상처 입은 것은 상처 입은 것끼리 보듬고 다듬고 잇대어 이웃하며 어울림의 한 마당을 이루듯,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신분인 민초의 삶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한 면 한 면, 한 조각 한 조각의 천한 천들이 맞대고 기대어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가 되듯이, 민초들 또한, 부둥켜안고 맞대고 어울리면서 같은 듯, 다른 듯한 삶을 이루고 있다. ‘쓸모없음의 쓸모(無用之用)’를 생각게 한다. 그들은 쓸모가 없어져서 버려야 할 헝겊 자투리 천을 버리지 않는 검약의 정신과 한편으로는 그 쓸모 없음(無用)’의 조각을 쓸모 있음(有用의 조각 모둠으로 승화시키는 역설적 삶의 혼의 소유자들이다.

 

여기에서 보듯, 조각보는 적과의 포옹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회화적 수준에 오르기 위한 과정과 마찬가지다. 민초들의 삶 또한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와 비뚤어진 사각형 등의 다름끼리 포옹하고 어울리면서 한세상을 이루는 것과 같다.

 

깊은 밤, 가녀린 여인네의 손끝에서 천과 천은 바늘 끝으로 이어지고 무엇이 그리 바쁜 듯, 빠른 손놀림은 천에서 천으로, 조각에서 조각으로 연결 짓고 있다. 이렇듯 조선 시대는 물론이고 현대를 살아가는민초들의 마음 또한 비록 잘려 나온 자투리한 조각의 삶일지라도 그 천한 조각들을 이어조각보라는 세상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다. 조각보와 같은 대동의 세상을 민초들 또한 한바탕 어울림의 마당을 펼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조각보는 대부분 불규칙한 문양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호화스럽거나 화려하지 않기에 소박한 가운데 멋과 예술성을 가지고 있고 절약성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구성과 멋은 지극히 민초들의 삶의 바탕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왜냐면, 한 조각 자투리 천 같은 삶을 이루는 그들의 세계는 무엇보다 끈끈한 정과 이웃사랑으로 뭉쳐져 있기 때문이다. 세모나 네모, 둥근 것이든 모난 것이든 서로 맞대고 어울리며 불균형의 균형미를 이룬다.

 

자투리의 삶인 조각보가 상보나 보자기의 쓰임에 마음을 두지 않듯이 민초의 삶이란, 높은 지위에 오르기 위한 간절함도 도달하고픈 마음도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도 바라고 꿈을 꿀 수는 있지만, 현실은 외면하고 거리를 둔다. 그렇다고 이러한 민초의 삶을 철학과 사상의 빈곤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서로가 만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어린 왕자>에서도 길들여진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라고 했듯이 조각보 또한 조각과 조각끼리 길들어져 가면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조각보처럼 함께 사는 세상을 이룬다는 것은 관심과 배려, 인정, 그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삼투하며 대동 사회를 이뤄가는 민초들의 세상살이와 같음은 물론이다.

 

이어령 교수는 조각보를 몬드리안의 그림에 비유하면서 조각보가 백남준의 뿌리라고 했다. 그렇다.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버려진 천의 자투리가 한국문화의 원형이듯, 한 국가를 이루는 저변의 끝자락엔 언제나 민초들의 발자국과 손자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 흔적은 버려지고, 잘리고 찢어지는 조각보 같은 다양한 도형들의 모습들이다. 그 도형들의 맞대고 이어지는 어울림의 삶은 함께 사는 조각들의 자투리 미학이기도 하다.

 

논어에서는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 고 했다. 빠름이 아닌 느림으로, 건성이 아닌 정성의 자세로 잇고 다듬는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 작위적이지 않은무기교의 기교인 조각보도 그렇다. 또한, 버려지고 잘린 자들의 삶 속에서도 옷깃의 먼지와 머리카락에 얹힌 나뭇잎을 서로 떼어주는 민초들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사대부들의 삶을 해학적으로 그린 혜원 신윤복 보다는 민초들의 삶을 많이 그린 단원이 떠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잘리고 버림받은( )한 천 쪼가리들의 어울림인 조각보, 눈으로 보지 말고 가슴으로 읽자. 버려야 할 삶 몇 조각, 한 쪼가리 쓰임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가짐으로 침묵하는 천의 조각들에서대동의 미학이라는 민초(民草)들의 웅얼거림에 귀 기울여보자.

 

[홍영수 칼럼] 조각보, 대동의 미학 - 코스미안뉴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도가(道家)는 노장(老莊), 유가(儒家)는 공맹(孔孟) 등으로 일반화시킨다. 이 말인즉슨, 그 틀 안에서만 접근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틀 안에 사상과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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