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가 뽑힐 것 같은 태풍을 안고 살아야 하는 바닷가에, 염분을 머금은 소나무 한 그루. 죽음의 가지 끝에 수많은 솔방울을 매달고 있다. 절망의 끝에 선 몸부림으로 주렁주렁 매단 방울들. 희망 없는 예감이 들 때 생명력은 더욱 강해지는 것일까, 자기 죽음을 예고하듯 저토록 많이 매달고 있기까지 침묵의 고통은 상처 난 곳에 스며든 바닷물처럼 쓰라렸으리라. 가지가 찢길 듯 많은 방울을 매달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아니, 죽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기에 더 많이 매달아야 하는 슬픈 생존의 역설이다. 지금도 잿빛 주검의 침묵으로 서 있다. 바로 곁에는 갓 자란 소나무 한그루 하느작거린다. (어불도(於佛島) 바닷가에서 본 풍경)
가끔은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꿈꾼다. 생소하고 이색적인 풍경이 다소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행은 매혹적이고 생산적이다.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을 느낄 때 물리적 공간인 시골을 내려간다. 도착할 때면 언제부터인가 토방 마루 기둥의 녹슨 못에 걸려 있는 몽땅 빗자루에 시선이 향한다. 구순 노모의 모습이 겹치기 때문이다. 깊은 뜻은 형상 너머에 있다고 한다(境生象外). 보이는 형상이 아닌 보이지 않는 그 너머의 것을 읽을 때만이 볼 수 있고, 들리는 소리 듣지 말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가을 들녘, 고속도로 주변의 누런 벼는 달리는 차의 속도에 의해 점과 면처럼 느껴지지만, 느리게 걷는 시골집 앞 들녘의 익어가는 벼 이삭은 나와 일체가 되어 작품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어머니의 모습을 그냥 스치듯, 대충 훑어보는 시선을 거두고 가까이 다가서면 얼굴의 검버섯이 몇 개인지 알 수 있고, 마주 잡은 손과 껴안는 체온에서 열 달을 품은 감동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몽땅 빗자루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햇살과 비바람이 실어놓은 알갱이를 쓸어 담았을까. 그 사이 아랫도리는 닳은 만큼 시리고, 쓰리고 아팠을 것이다. 저 몽땅 빗자루와 수십 년 함께 해 온 어머니 또한 그러하셨으리라.
햇귀의 기지개 켜는 소리에 일어나신 어머니는 잠든 식구 혹여 깰까 조심스레 문지방을 넘으셨다. 어둑새벽, 우물에서 맑은 정한수 한 대접 들고 장독대에 놓고 기도 한 사발을 올리셨다. 그리고 저 빗자루로 대청마루, 토방 마루를 쓸고 또 쓸어 담으셨다.
닳고 닳은 몽땅 빗자루 아랫도리처럼 어머니는 위아래의 텅 빈 뼛속에 아리는 듯한 새벽 찬 공기가 파고들어 와 공명을 했다. 그토록 헌신하면서도 드러내지 않고, 닳아가는 자신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며, 속울음은 깨물어 소매 끝에 접고, 눈물은 돌아서서 슬며시 손등으로 훔치셨던 어머니. ‘희생하는 자의 마지막 언어’가 바로 ‘침묵’이라는 것을 어머니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게 ‘침묵’의 울타리를 치고 가리며 살아가는 풍경은 한편으로는 외로움의 상처였을 것이다.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무시당하고 질투할 때는 갈등이 동반하지만, 누군가 나의 가치와 나다움을 인정해 주길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평생 사랑을 치마로 두르시고 헌신을 저고리로 입으시는 어머니와 온몸 닳아가며 티끌을 쓸어 낸 뒤 반 토막의 경전으로 녹슨 못에 걸린 몽땅 빗자루, 그 끝에는 인정보다는 긍정의 정신으로‘침묵’의 두 글자를 매달고 있다.
마크 로스코의 <무제: 회색 위에 검정 > 을(로스코는 해석이 부질없다고 했지만)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검정과 회색의 경계에서 우울한 내면의 죽음을 엿볼 수 있다. 고립된 듯 고요하고 거대한 침묵 속에서 위대한 성자를 만난 듯하다. 그렇다. 토방 마루 벽의 녹슨 못에 걸려 ‘버림’과 ‘쓰임’의 경계에 선 빗자루의 외로운 침묵과 문지방을 세 발, 네 발로 넘나드시며‘훗승’과 ‘이승’의 사이에 선 어머니의 평화 속 고독한 침묵, 마크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눈물을 흘린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희생하는 침묵’의 두 풍경을 보면 통곡을 해야 할까? 아님, 속울음으로 삼켜야 할까? 차마 어찌 그림 한 편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스 퀴슬러 로스(Elisabeth 정한수Kubler-Ross)의 <상실수업>에 나온 말이다. 쓸고, 쓸어 담다 닳고 닳아 몽땅하게 된 빗자루, 고난과 역경, 평생 힘들게 자식들 뒷바라지한 고통의 나날들을 후회하지 않고 부딪쳐 꼭 껴안으며 다가서서 품어 주고 받아드린 어머니. 저항하지 않고 느끼고 수용하며 배설한 고통의 한 가운데 ‘평화의 침묵’이라는 한 송이 꽃이 침묵의 정중앙에 피어 있다. 또한, 노모의 뒷모습과 몽땅 빗자루에 새겨진 주름진 손금에도 희생하는 자의 무언의 꽃봉오리가 맺혀있다.
붙잡아서 어디에도 매달 수 없는‘고독’의 한 종지를 사립문 위에 띄워 놓으신 어머니. 영원한 생명의 빗자루가 되어 먼지 낀 마루판 사이와 누군가 밟고 디뎌야 할 마룻바닥의 티를 티 나지 않게 쓸어 주신 당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여자가 아닌 어머니였을지 모른다.
어머니! 당신의 침묵은 가을이 앉아있는 벼 이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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