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시골에 살면서 주의 깊게 봤던‘돌담’을 다시 생각한다. 어떠한 비바람과 태풍이 몰아쳐도 태연한 척 늘 제자리에 있었다. 당시 돌담을 쌓으신 아버지는 돌을 이리저리 굴려보고 들어 올려 보기도 하면서 서로가 맞지 않으면 다시 이쪽저쪽을 바꿔가면서 쌓으셨다. 그렇게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지금까지 돌담이 돌담으로 서 있는 것은 바로 돌을 돌 자체로 볼 수 있는 안목과 특별함을 지닌 돌들의 개성 자체를 돌담 쌓는 아버지가 인정했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장소의 돌들이 담을 위해 한 곳에서 모여있다. 돌의 각진 쪽은 비슷한 각으로 맞추고, 둥글납작 한 것은 그 둥긂을 안을 수 있는 깊게 파인 곳과 맞물리고, 뾰쪽한 곳은 넓은 틈새에 끼워 맞춘다. 각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몫에 충실하기 위해 둥근 돌은 모난 돌을 보고 모난 성격자라 하지 않고, 모난 돌 또한 둥근 돌을 보고 두루뭉술한 인격자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넓적 돌은 좁은 돌을, 좁은 돌은 넓적 돌을 의식하지도 탓하지도 않고 각자의 몫에 충실할 뿐이다.
이러한 다양체의 돌들이 모여 담장이라는 하나의 울을 만든다. 분별을 지우고 경계를 허물며, 김춘수의 시 <꽃>에서 보듯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몸짓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한다. 무의미했던 존재가 관심을 가지니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돌담도 마찬가지이다. 생김새와 크기와 태생 등이 다른 몸짓들에 불과하지만 맞대고 있으면서 공생한다. 하나의 무생물이지만 오히려 손 내밀어 맞잡고 소통의 공간인 숨구멍을 만들어 넘어지지 않는 돌담이라는 의미가 되어 서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라는 돌담을 쌓아 그 안에서 살아간다. 각자 가족과 태어난 고향, 학교, 직장 등, 돌들이 돌담을 이루듯 다른 개체와 개성들이 돌담이라는 사회를 이루어 그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한 인간 사회에서는 과연 돌담이 허물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서 있을 수 있는 틈새, 즉 소통이라는 돌담의 숨구멍 같은 것이 있을까.
지금은 그 어떤 정보도 손바닥 안에서 얻고 해결하는 초고속 정보화시대이다. 그래서 독립적이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보편화 되어 있다. 과학의 발달은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을 잠그게 한다. 이러한 사회환경 속에서는 오직 편견과 선입견, 오만과 독선이 앞설 수밖에 없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지 않으니 소통은 불통이 되고 불통인 사회에서는 극한 대립과 반목의 고통이 있을 뿐이다. 그 예가 바로 티브이만 켜면 서로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공적인 인물들, 그들은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고. 또한, 가족이나 직장 더 나아가 사회 전반에 걸쳐서 극단의 대립 감정으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경멸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측면의 인정마저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막 나가고 있다. 대화와 소통의 부재, 소통의 한계에서 우린 비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휩쓸려 오직 자신만 위하는 독선과 독단주의자에게는 돌담을 지금까지 돌담으로 서 있게 한 대화의 숨구멍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불통의 장애 요인을 제거하는 ‘소통’이라는 생활 무기가 필요하다. 소통은 다양한 의견과 다중의 취향을 꼭 껴안아 주고, 특히 이분법적이고 비합리적인 사유의 방식을 전복시켜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세대 간의 갈등과 성(性)차별, 지역과 학연 등으로 꽉 막혀있는 오늘날, 말 그대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은 돌담의 소통방식이다.
돌담은 소통의 통로이다. 구멍이 숭숭 뚫려 빗방울은 스며들고 바람은 길인 듯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벌 나비도, 꽃향기도 사람들의 정도 오간다. 작은 틈새를 굳이 메우고 채우려 하지 않는 비움의 미학이다. 인간도 돌담이라는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살아가기에 자신을 내려놓고 비워야 한다. 비움으로써 채워지고 경계 짓지 않아야 나는 네가 되고 내가 네가 되어가는 것이다. 다양한 질감을 가진 돌들이 돌담을 이룬 어울림 속에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숨구멍이라는 소통의 장소가 있기 때문이다.
그 소통의 공간으로 사람이 보이고 언덕 너머의 세계도 보이면서 공정과 정의가 숨을 쉴 수 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화를 해야 한다. 대화가 없다는 것은 소통이 없다는 것이고 소통이 없다는 것은 이타적(利他的) 인간관계가 아닌 배타적 동물의 관계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언젠가 휴가 때 시골 논두렁 길을 걷는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곧 소낙비가 올 것 같은 하늘을 올려 보았다. 그런데 그 먹구름의 가느다란 사이로 뭐라고 형용키 어려운 강렬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을 한참 바라보며 먹구름 같은 장막이 드리운 친구 사이일지라도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작은 틈새가 있으면 한 줄기 희망의 빛으로 친구가 다가오리라 생각했다.
인간(人間)이란 단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돌과 돌의 사이가 있어 돌담이 있다. 숭숭 뚫린 구멍이라는 자기 비움이 없으면 돌담은 무너진다. 돌담이 바람과 맞서 싸워 견디고 이기려고 담을 쌓은 것이 아니다. 바람과 더불어 숨 쉴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틈새를 메우지 않고 그냥 두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도 오직 나만, 이것만, 저것만 하는 편 가르는 식의 분별과 경계 짓는 의식을 버리고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소통은 이것도 저것도 아우르는 포용력과 관용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분법적인 분별 의식의 마음가짐에는 어느 누가 다가오지도, 안아 주지도 않는다. 오직 열린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이는 수납적 자세를 가져야만 대화와 소통의 조명이 가능하다.
돌담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각자의 돌들이 나는 너를 지고 있고, 너는 나를 이고 있으며, 나는 너를 안고, 너는 나를 베고 있으면서 모듬살이를 하고 있다. 서로 맞물리면서도 억지로 꿰맞추지 않는 그 자연스러움에서 피어난 것이 숨구멍, 즉 소통의 장소이다. 그곳은 바람이 자기의 길인 듯 자연스럽게 스쳐 가는 숨구멍이고 돌과 바람이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소통은 부딪침의 체험이지 상상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마르틴 부버는 “나는 너로 인해 나가 된다”라고 했다. 돌담이 서로 안고, 베고, 이고, 지고 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이다. 자기만이 절대적 가치고 최고의 선인 듯 살아서는 아니 된다. 접촉을 통해 소통하면서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자기를 비우자. 서재의 창문을 가로막고 있는 책들을 치우면 어둠침침했던 방안에 햇빛이 들어온다. 장자의“허실생백(虛室生白”이 떠오른 이유다. 쥔 손을 펴면 허공이 손에 가득하다. 이렇듯 비우고 변해야 소통을 할 수 있다. 닫힌 마음을 활짝 열고 타인이 들어 올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돌담이 비워둔 공간으로 바람이 배시시 웃으며 길인 듯 스쳐 지나가듯 인간의 삶 속에도 허투루한 숨구멍을 두어 소통의 길을 놓아야 한다. 돌담이 되자,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숨구멍을 가지자. 소통은 너와 나의 가로막힌 장막을 여는 열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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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https://www.cosmiannews.com/news/11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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