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소쇄원(瀟灑園), 沈黙없이 침묵하는 음악을 듣다

홍영수 시인(jisrak) 2022. 9. 29.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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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의 ‘433라는 음악을 떠올린다

그의 음악은 선율의 아름다움이나 심금을 울린 음악도 아니고 가슴을 파고드는 울림의 멜로디도 아니다. 주변의 소음과 일상적인 소리에 관심을 가지고 기존의 틀에 갇힌 감옥에서 탈출한반예술(anti-art)의 음악이라는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소위 우연성의 음악을 추구했던 음악가이다. 이러한 음악에 영향을 준 것은 인도 철학자 사라브하이(Gita Sarabhai, 1922-2011)이다. 인도의 음악과 철학을 배우면서 동양의 사상이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예술과 문학은 경계를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양의 음악 세계는 7음계의 음표 체계에 안에 갇혀있다. 이러한 체계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 존 케이지의 우연성의 음악이다. 소쇄원 정원에서 한 선비의 사상과 역사적, 인문학적 탐구라는 박제된 액자에서 뛰쳐나와 존 케이지처럼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력, 아님, 축척 된 이론의 한계를 벗어나 감각적, 시각적 혁명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中唐 시대를 이끈 백거이는 별장과 정원에 관한 시를 많이 쓴 시인이다. 이러한 유행은 명나라 사족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 들어서 정원문화의 유행도 주목할 만한 당시의 풍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산 윤선도의 세연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사족들은 원림(園林)을 하나의 인격체로 규정한 그들의 산수자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意園(의원)’ 즉 생각 속의 정원을상상의 정원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들이 즐긴 것은 산수 자연이 아니라 상상’‘하는 세계관이었을 것이다. 필자 또한 생각 속의 정원에 누워 상상의 정원을 상상해 본다.

 

소쇄원은 瀟灑處士 양산보(1503-1557)가 지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원림이다. 기묘사화로 인해 스승 조광조의 죽음을 보고 낙향해서 그가 이뤄놓은 것이다. 이곳은 분명 인위적임에도 불구하고 인위와 자연이 구분되지 않는다.

 

주인이 거처하는 곳은 비 갠 후 떠오른 달빛(霽月堂)’달빛에 부는 청명한 바람(光風閣)’에서 알 수 있듯이 소박하고 단아한 두 건축물에서 결코 자연을 거스르지도 희롱하지도 않으면서 하나가 되어 공존하며 합일하는 선비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소쇄원의 역사적 가치와 의미, 건축물과 조경의 배치 등을 읽고 느끼기 전에 이곳은침묵의 음악이라는 익숙한 듯 낯선 섬뜩함의 언캐니Uncanny로 다가왔다.

또한 소쇄원은 들어선 순간 물아일체가 되어 사사로운 욕심도 수치스러운 듯 숨어버리고 자연의 화음을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자연의 화음은 소리 없는 화음이요 소리 있는 침묵이었다. 침묵의 음악은 주인이 거문고를 타는 주체보다는 초정(草亭)의 대봉대에 거문고를 가만히 앉혀 놓으면 바람과 물소리, 새소리와 나무들의 웃음소리와 돌담의 속삭임이 중심 없는 중심이 되어 협연한다. 본질적으로 탈중심적인 장소이다.

 

자연의 음악을 들어보자. 햇빛 한 방울 댓잎에 구르는 소리, 계곡의 돌 틈새를 가르는 한 움큼의 물소리, 담을 이룬 돌과 흙의 소곤대는 소리, 새의 날갯짓을 데려와 사그락대는 댓바람 소리, 봉황의 날개 죽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오동나무의 한숨 소리, 가을 나뭇잎의 붉은 목소리, 숲의 적막한 혈관 속에 불타는 피의 소리, 나뭇잎과 바람의 입맞춤 소리, 소쇄한 바람에 광풍각 창문이 새실새실 웃는 소리. 조각 털구름이 제월당 처마 끝을 스치는 소리, 대나무의 구불구불 휘청휘청하는 소리, 속세의 티끌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정원의 심호흡이 방문객의 옷깃을 여미는 소리, 그리고 정원을 미음완보(微吟緩步) 하며 침묵하는 나의 읊조림.

 

대음희성(大音希聲)이라고 했던가. 모든 요소가 하나의 음표가 되어 공명하는 음악의 정원, 자연의 소리가 침묵의 음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심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내 마음은 이미 우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또한, 온 우주의 심장 소리와 지구가 빙빙 도는 소리 등의 거시적인 감각 너머의 현상을 겪고 들으며 매혹적인 뱃멀미를 했다.

 

다시 존 케이지 433초를 생각한다. 1악장은 33, 2악장은 240, 악장은 120초이다. 연주자는 백지 같은 악보를 계속 넘긴다. 피아노 뚜껑을 닫고 열고 숨소리와 빗방울 소리, 관객들의 웅성대는 433초의 침묵의 음악은 이곳 소쇄원의 소리 대신 자연이 연주하며 침묵으로 채운 음악에 비하면 그의 음악은 아류일 뿐이다.

 

시작도 종료도 없는 소쇄원, 자연의 음악을 주고받는 곳이 아니라 자연의 숨소리라는 음표에 따라 말 그대로 자연이 스스로 그렇게 연주하는 곳, 양산보는 쇄쇄원에 별서 정원을 짓는 게 아니라 침묵하는 자연의 음악을 작곡했다. 그리고 5백 년 넘도록 단 한 번도 저작권료를 받지도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소쇄원

 

 

현실의 무게가 증발한 공간에

하늘거리며 흐르는 자유

무심코 지난 햇살을 데려와

댓잎 파릇, 반짝인다.

세상을 얕보지도 우러러보지도 않기에

중심도 변두리도 없다.

오동잎 그늘 한 자락은

드나든 이 가늠하지 않고

무심한 우듬지는

깃든 새를 가리지 않는다.

동떨어짐과 가운데를 떠나고

등지고 마주 대한 것도 초월한 곳

나도 없고 너도 없어

하늘과 땅이 어깨동무한

중도가 중도로 머무는 곳.   

 

 졸시   

 

 

[홍영수 칼럼] 소쇄원(瀟灑園), 沈黙없이 침묵하는 음악을 듣다 - 코스미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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