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중턱에 안성의 산사를 찾았다. 엄동설한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넓은 경내를 살피면서 지금은 사라진 요사채 자리를 유심히 바라보며 호젓한 사찰의 마당에 서서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바우덕이를 생각한다. 동가숙 서가식 하며 떠돌아야만 했던 그들, 이곳에서 받은 신표(信標)를 들고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안성 장터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던 곳이 바로 청룡사이다.
그들이 지금처럼 추운 겨울에는 연희를 하지 못해 이곳으로 돌아와 출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공연을 위해 부족한 기예를 익히고 따뜻한 봄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렇듯 삶이 배고프고 고달팠던 그들의 사연들이 맴돌고 숨 쉬었던 성지가 바로 이곳 청룡사이다. 곳곳에 베인 사찰의 외형적 요소와 내적인 품격을 통해 닮은꼴이 많음을 알 수 있다
남과 남이지만 결혼을 하면 서로 닮아 간다고 한다. 그렇듯 남사당패와 그들의 안식처 같은 청룡사는 닮을 점이 많다. 그들의 프로다운 연희 정신과 발자취가 희미해져 감을 아쉬워하는 듯 사찰의 단청 빛도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다. 처음의 단청은 빨강 파랑 노랑 하양 검정의 이른바 오방색인데 음양오행설에 의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채색을 하게 된다. 이러한 장인정신과 남사당패의 고유한 우리 풍물의 연희 속 그들만의 전문성 또한, 동질성 차원에서 생각해 보게 된다.
불과 100여 년 전에 풍물, 살판, 어름판, 버나, 덧뵈기, 덜미 등 여섯 마당의 놀이가 어우러졌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들을 생각하니 어렸을 적 필자가 보았던 시골 5일 장터 사당패의 연희 모습이 떠올라 감회가 새롭다. 한겨울인 지금, 그들의 겨울나기 생각에 찾는 나그네의 마음이 착잡해지고 다시 볼 수 없음에 그저 안타까움을 토로할 뿐이다. (다행히 지금은 2001년에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로 시작되어 2011년‘안성 프레 세계민속축전’으로 확대되었다)
이 사찰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김암덕, 우리가 흔히 ‘바우덕이’라 불리는 당대 최고의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서다. 100여 년 전 그들은 이곳에서 숙식하며 삐리들은 기예를 익히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듣고 보아왔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곳, 한마디로 그들 세계의 정보 메카라 부를 수 있는 장소다. 바로 그 자리에 그들의 숨결을 느끼며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 위해 온 것이다.
본명이 김암덕(金巖德)인 그녀의 예명은 ‘바우덕이’이다. 바위 암(巖)자의 음인 ‘바위- 바우’와 ‘덕(德)’의 ‘덕이’을 이어 부르면서 ‘바우덕이’가 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최초의 여성 예인집단의 우두머리인‘꼭두쇠’로 남사당패를 이끌고 전국을 떠돌며 유랑 예인집단을 이끌면서 연희를 했다. 1848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5살 때 남사당패에 가입했다. 조선 후기 당시에도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여서 여성의 활동이 제약받는 때였다. 물론 당시의 예인집단은 신분적 위상이 높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여성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되었다는 것은 당대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면 성별의 차이를 횡단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더구나 여성으로서 남자들로 구성된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고 전국을 돌며 연희를 이끌었던 여성 예인이기에 더욱더 그렇다.
무엇보다 그녀가 이끈 남사당패는 뛰어난 기예와 재치 있는 재담의 마당놀이로 힘들었던 노역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그 공이 인정되어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정3품에 해당하는‘당상관 옥관자’를 얻었다. 이 또한 엄격했던 신분 사회의 금기를 깬 하나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천대받았던 유랑집단의 예인들에게 큰 이슈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영기(令旗)에 걸린 옥관자는 전국을 떠돌며 연희를 했던 그들에게 커다란 자부심과 명예를 안겨 주었다. 그 결과 바우덕이가 이끈 안성 남사당패가 지나가는 곳 어디에서든 다른 사당패 집단은 예의를 표하는 ‘旗拜’즉 깃발을 숙여 절을 했다.
조선 후기 장터와 마을을 떠돌면서 춤과 노래, 곡예를 무기 삼아 살아가던 무리들, 이름하여 유랑 예인집단, 상세한 자료가 변변치 않을뿐더러 일제 식민지가 시작되면서 급격히 단절되어 그들의 실체 규명이 어렵다. 사당패, 솟대쟁이패, 초란이패, 걸립패. 각설이패, 등으로 불리는 유랑 예인집단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제대로 드러나질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양반들이 천민 집단이었던 이들에 대해 자료를 남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인집단이야말로 어느 시대에서나 서민들과 함께 애환을 나눠온 당대의 ‘대중스타’가 아니겠는가.
사실 지금의 연예인은 그 분야가 천태만상으로 세분화 되어 있지만, 전통의 시대에는 미분화되어 예인집단이나 세습적인 천민 집단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오늘날에는 청소년에게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어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비록 시대가 다르긴 해도 민중 속에서 함께 부딪히며 살아온 예인이 추구하는 세계관은 예나 지금이나 같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바우덕이가 활동했던 시대의 남사당패는 오히려 지금의 연예인보다 더 전문적이고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코메디아 델라르트’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어원 그대로 ‘희극’과 ‘기술’의 결합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7~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각국의 연극사에 영향을 준 이 집단은 길거리와 광장을 떠돌며 개방적인 요소를 두루 지닌 가장 대중적이고 창의적인 예인집단이었다. 그리고 매우 배타적이어서 자기들끼리만 결혼했고, 거기에서 출생한 아이는 어려서부터 저절로 부모 품에서부터 연기술을 배웠다. ‘코메디아 델라르트’가 바로 남사당패 전형이 아닌가 싶다.
그녀는 꽃다운 나이 23세에 세상을 등졌다.
사찰을 둘러보고 나오는데 넓은 주차장에 한 편에서는 70세가 넘어 보인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검은 쌀과 손수 만드셨다는 곶감, 땅콩 등을 팔고 계셨다. 모닥불에 곁불을 쬐면서 따뜻한 두부와 김치를 쪼그려 앉아 먹으면서 할머님께 바우덕이에 관해 여쭤보았다. 바로 그때 안성에서 구전으로 전하는 바우덕이의 노래를 불러주셨다. 치아도 몇 개밖에 없는데 흥이 있어서인지 구성진 가락으로 아래와 같은 노래를 잘 들려주시면서 어깨춤까지 추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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