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도 나의 비망록 표지에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질문-탐구(탐색)-해답(質問-探究(探索)-解答), 의문-관찰(관심)-발견(疑問-觀察(關心)-發見). 이 말은 평소 독서를 하거나 상념에 잡혀 있을 때, 또는 무념무상. 멍 때리고 있을 때 등, 그때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을 수사차록(隨思箚錄法) 하거나, 묘계질서(妙契疾書) 해 제본해 놓은 것이다. 벌써 몇 권째이다.
우린 학교 다닐 때부터 선생님께 왠지 질문하는 것에 머뭇거렸다. 그래서 오직 선생님이 가르치는 것을 받아 적고 외우면서 선다형의 시험공부에 열중했다. 깨달음을 부르는 호기심이 없어져 파편화된 지식만 습득한다. 사실 유대인들이 노벨상을 많이 받게 된 이유가 질문하는 습관을 가정에서부터 길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도 제주 대정리 향교에 “疑問堂”의 현판을 걸어놓고 유생들을 가르쳤는데 스승의 말만 따르지 말고 스스로 의문에 의문의 꼬리를 물고 공부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물론 질문이나 의문이 없이 바라봐도 하늘은 높고, 바다는 넓다.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고 물은 H2O로 되어있다. 그렇지만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상식과 고정관념에 질문과 의문을 가지고 시비를 걸면 익숙하고 낯익은 것들이 어느 순간에 낯설고 생소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경험을 맞이하는 순간 우린 고정관념에서 해방되고, 야성적 철학을 체험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질문만 있고 답이 없을 수 있고, 의문을 품는데 의문점이 반드시 풀린다고는 할 없다. 그래서 그 어떤 답과 해결점을 찾지도 구하지도 말고 그냥 툭 던져보는 것이다. 특히 시인과 예술인들은 질문과 의문을 던지고 품을 뿐 정답을 애써 구하지는 않지 않은가. 굳이 답을 찾을 이유 또한 없어서이기도 하다.
(물음느낌표 Interrobang)라는 문장부호가 있다. 인터러뱅은 물음표(?)와 느낌표(!)와 합쳐서 만든 문장부호이다. 이것은 1962년 미국 광고대행사 사장 마틴 스펙터가 만든 개념의 부호이다. 묻고 느끼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쳐졌을 때 창의적 발상이 생긴다는 의미에서 물음표와 느낌표를 하나로 결합해interrobang을 고안해 냈다. 물음과 느낌의 두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는 하나의 부호이다. 물음표는 느낌표와, 느낌표는 물음표와 함께할 때 통찰력 있는 창조와 특별함을 이뤄낼 수 있다는 색다르고 신선한 발상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듯 의문과 질문, 질문과 의문 뒤에는 그 어떤 답이나. 해결보다는 오히려 상상력과 창의력이 돋을새김으로 표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음표와 느낌표가 서로 만날 때 생각은 커다란 폭발을 일으킨다. 고로, 너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논점을 떠나 세상을 향해 감성과 비논리적 그리고 다소 엉뚱하고 비틀어진 질문과 의문을 던지자. 그러한 의문과 질문의 끝에는 상상을 초월한, 예상치 못한 질문과 의문 너머의 그 무엇을 만날 것이다. 질문하고 또 질문하자. 그리고 의문을 품고 또 의문을 품자. 그러는 사이 알게 모르게 커다란 변화와 특히 상상력과 창의력이 생길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학은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의 분야라고 상징처럼 받아들인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수학의 확실성 때문에 인간성이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했다. 과연 꼭 그렇다고만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술 한 잔에 다른 술 한 잔을 따르면 두 잔이 아닌 한잔이 되지 않는가. 처마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 하나가 떨어져 있는 빗방울 하나와 합쳐지면 결국 두 개의 물방울이 아닌 하나의 물방울이 되지 않는가. 이렇듯 계산법의 정수인 산수의 자명한 이치조차 의심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웠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평행한 두 직선은 결코, 만나지 않으며 한 점을 지나는 평행선은 하나밖에 없다고 배웠다. 그렇지만 수학자 리만은 타원형 구(球)의 표면에 직선을 그리면 그 공간에서는 모든 직선이 두 점에 만나게 되어 평행선은 없다고 했다. 소위 말한 ‘리만의 기하학’이다. 이처럼 우리가 배워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끝없는 질문과 의문을 던지고 품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과연 세상의 진리는 무엇이고 정답이라는 게 있는 것일까. 수확만큼은 확실한 것으로 생각되는 학문에서조차 의심과 질문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끝없는 질문을 던지면서 탐구하고 탐색하게 되면 해답이 보일 것이고, 한없는 의문을 가지면서 관찰하고 관심을 두게 되면 무엇인가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저의 비망록에 표지에 적힌 질문-탐구(탐색)-해답(質問-探究(探索)-解答), 의문-관찰(관심)-발견(疑問-觀察(關心)-發見)에서 ‘해답’과 ‘발견’의 의미는 바로 상상력과 창의력의 다름 아니다. 이렇듯 지속해서‘질문’과 ‘의문’을 던지고 품어보자. 남다른 생각은 남다른 질문과 의문 속에서 탄생한다.
이같이 갈고리(?) 모양의 의문부호에 수많은 질문과 의문을 매단다면 결국에는 갈고리가 느낌표(!)처럼 펴져서 밑의 하나의 점처럼 상상력과 창조의 커다란 덩어리가 되어 영혼과 가슴에 맺히지 않을까. 그때 사색하는 우리의 삶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코기토의 삶이고, 인터러뱅Interrobang의 호기심에 찬 상상력과 창조가 아닐까.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나의 인문학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마드(nomade)적 視線 (0) | 2023.06.05 |
---|---|
챗GPT, 생각을 생각할 줄 아는. (1) | 2023.05.22 |
성심(成心)을 해체하고 허심(虛心)으로 돌아가자./홍영수 (1) | 2023.05.08 |
삼구홍타(三九紅墮)의 붉은 연꽃, 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홍영수 (0) | 2023.05.02 |
길상사(吉祥寺)-백석과 자야 길상화로 피어나다./홍영수 (0) | 2023.0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