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서재는 넓지도 좁지도 않다. 책상에서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는 수시로 만져야 할 책이고, 그 외의 책들은 십진분류법이 아닌 나만의 분류법으로 언제든 손쉽게 찾도록 책장에 꽂혀 있다. 그리고 한 편에는 질서 없이 눕거나, 비스듬히, 때론 구겨지고 찢어진 표지 위에 쌓인 먼지를 머금고 흩어져 잠들어 있으면서 언제든 깨워 줄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말을 건네며 대화하고, 노래 부르고, 건물을 짓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책꽂이는 같은 책끼리 꽂혀 유유상종하고 바로 곁에는 또 다른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렇듯 다른 사고와 이념을 가지고 이웃하며, 같은 책장에서 類類相從(유유상종)하면서 異類相從(이류상종)을 하고 있다. 저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모든 가락은 또 다른 생각의 멜로디가 되어 새로운 가치의 협화음으로 다가온다.
우린 형식화 되고, 정형화된 문학과 예술의 형식에 예속되어 부림을 받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창의적 사고를 하는 문학은 그 어떤 사조와 구속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한 우물만 파는 것이 아닌 여러 우물을 파서 수질을 비교 검토해 몸에 좋은 우물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전문가가 아닌 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방송에서 유명했던 분이 운영하는 파주의 헤이리에 있는‘카메라타’라는 음악 감상실에 갔던 기억이 난다. ‘카메라타[camerata]’는 16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 집단을 말한다. 그들은 피렌체 바르디가의 후원을 받는 작곡가, 시인, 학자, 예술 애호가들의 모임이고, 오페라를 탄생시켰다. 비슷한 예로 조선 사회도 양반층의 비슷한 취향의 문인 사대부들이 음악, 시 짓기, 낭독 등을 하는 우아한 모임인‘아집雅集’, ‘아회雅會’가 있었다. 이 모습은 많은 회화 속에 담겨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아님, 인접 학문끼리의 모임은 다분히 노마다드적 시선들이 고원과 사막에서 풀과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했을 것이다.
수십 가지의 반찬을 곁들인 정갈한 한식도 좋지만, 필자는 순댓국에 한 잔 술을 선호한다. 그것은 값의 고저를 떠나 살아온 식생활의 습관일 수도 있다. 또한, 대원각(現 길상사)이나, 삼청각, 선운각 등의 3대 요정의 음식점 가격과 낙원상가와 파고다 공원 주변의 저렴한 가격은 결코 섭취하는 음식의 질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 순댓국이나 해장국을 먹는다. 팔팔 끓는 그릇 속에는 선지와 돼지머리 고기, 창자, 순대, 등등 많은 돼지고기의 부속품들이 들어있다. 좋은 부위는 분류해서 비싸게 팔고, 버려진 천 조각들의 모임인 조각보처럼 다양한 부위의 총체적, 융복합적 요리에서 기계론적인 사고를 벗어나 다중심적이고 복합적인 유목민의 시각과 미각, 후각 등등으로 바라보면서 사고를 건져 먹고 후루룩 마시기도 한다.
세기말 빈을 무대 삼아 펼쳐지는 문화사와 지성사는 절정의 시기였다. 문학과 음악, 건축, 미술 등, 그 시대의 주역들은 모두 한 무대에서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결코, 이들의 작업은 혼자가 아닌 씨줄과 날줄로 엮이어 상호 간의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았다. 러시아의 마야콥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메이어 홀드 등도 각기 다른 위치였지만 서로 교류하면서 성장했다. 이는 시각이 돌아다니는 노마드적 교류의 결과이다.
지금은 특정한 장소와 공간에 머물지 않고 유목민처럼 옮겨 다니며 불모지를 개척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AI와 다양한 디지털 기기의 등의 등장 때문이다. 그 결과 현 사회의 가치와 사고 등에 변화를 가져오며 시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자유롭고 창조적인 행위의 유목민이 되어 고원과 사막에서 풀과 물을 찾고 있다.
노마디즘(Nomadism), 즉 유목(遊牧)주의는 들뢰즈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이는 기존의 삶의 가치와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이리저리, 이곳저곳 이동하면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 창조함을 의미한다고 할 때, 어느 한 분야만 탐구하기보다는 그 근접 학문을 포함한 외적인 학문을 함께 탐독하면 기존의 가치체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그 어떤 경계도 허물어 버리고 또한 차이를 횡단하면서 공간의 자율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오감(五感)은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변화하면서 불변의 가치관과 고정관념의 굴레를 벗어나 변화 속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창조는 같은 종인 동종교배가 아닌 다른 종끼리의 이종교배에서 새로운 종이 나온다고 한다. 문학과 예술, 특히 글쓰기 또한 그렇다. 무감각하고 존재에 대한 불감증에 걸린 시대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특히, 인간의 경이로움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할 때 철저한 노마드적 시각과 시선, 독서가 밑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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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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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217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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