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규정할 수 없는 음악, 문학, 그림 등이 좋을 때가 있다. 어디서 본 듯, 들은 듯, 읽은 듯한데 생각이 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두물머리 근처의 수종사 아래에서 만난 강변의 몽환적인 濃霧(농무) 속, 눈에 드는 건 꿈속 같은 풍경과 몸으로 느끼는 건 미립자의 촉촉한 느낌, 이렇게 규정할 수 없는 비규정적인 무엇에서 그 너머의 무엇으로 나에게 다가올 때가 있다.
필자의 고향 산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70년대 초이다. 그 이전엔 나무 등잔에 석유를 담아 불을 켜는 호롱을 매달아 어둠을 밝혔다. 낮에는 힘든 농사일을 하시고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침을 묻힌 실을 바늘귀에 꿰어 헐고 찢긴 옷들을 밤늦도록 꿰매셨다. 그때 어머니는 호롱불 아래서 노랫말이 없는 비음(鼻音)으로 뭔가를 읊조렸다.
가사 없는 가사 너머의 곡조, 비음의 흥얼거림인데 흥이 없는 흥 속 ‘恨’의 노래, 나지막한 느림과 장단 고저 없는 밋밋함 속 은근과 끈기의 ‘樂’, 여기서 오는 상상력은 희미한 요소들로 피어오른 물안개처럼 어린 시절을 떠올린 순간 발휘되었다.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어머니의‘호롱불의 읊조림’ 에는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은“처녀공출(당시 어머니가 쓰셨던 말씀)”, 그것을 피하고자 꽃다운 시절을 겪어보지도 못하고 할아버지에 의해 열다섯 나이에 강제적? 早婚(조혼)을 했다. 또한, 어린 나이에 시부모 모시고 농사일까지 하셨으니 어머니의 ‘樂’이라는‘읊조림’ 속에는 ‘恨’이 맺힌 곡조가 흐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물머리에서 만난 짙은 안개 속, 한 치 앞을 식별하기 힘들었을 때 갑자기 무언가 눈앞을 스쳤다. 순간적인데 두루미 한 쌍이었던 기억이 난다. 구름 속 같기도 하고 꿈속 같기도 한 그 몽환적인 풍경에서 우주적 시원을 떠올렸듯,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 농무의 풍경 같은 어머니의 읊조림에서 우리의 전통가곡인 이삭대엽(貳數大葉)의 가곡이 생각났다. 정형시조 45자에 가락을 얹혀 부르는 시간이 무려 10여 분 소요 된다. 메트로놈의 박자기로도 측정하기 힘든 느림의 읊조림이다. 이렇듯 딱히 규정지을 수 없는 심장 너머에서 울려오는 느리디느린 소리의 풍경은 잊을 수 없는 은유이면서 상징이었다. 그 흥얼거리는 ‘읊조림’은 나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했고 그래서 내 마음을 고양해주고 환기시켜 주었다.
모두가 잠든 조용한 밤에 호롱불 아래 홀로 앉아서 옷을 짓는 어머니의 흥얼거림, 그것은 어쩜, 바늘귀에서 흘러나온 삶의 곡절이 담긴 자신에 대한 읊조림이었을 것이다. 그렇듯 어머니의 읊조림은 시대적 압박 상황의 또 다른 이름의 침묵이 아니었을까. 또한, 지금 침묵의 읊조림을 언어로 번역하고 있지만, 절대 그 어떤 해석도 의역도 해서는 아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들녘의 꽃들도 창공을 떠도는 구름도 강물 위에 피어오른 안개도 한순간도 제모습으로 있는 때가 없다. 순간에 사라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강에서 피어오른 짙은 안개의 흩어짐처럼 호롱불 아래서 홀로 읊조려진 애잔한 곡조가 저 멀리 점점 사라지듯.
두물머리에서 가까운 곳에 수종사라는 절이 있다. 정조대왕의 사위인 홍현주가 꿈속에서 부처를 만나 게송을 받았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 一點靑山 / 雲外雲夢中夢 ” 열 글자만 생각났다고 한다. 초의선사가 수종사에서 바라본 양수리의 풍경이 바로 “雲外雲夢中夢(운외운 몽중몽)”이었다고 한다. “한 점의 푸른 산 / 구름 밖의 구름이요, 꿈속의 꿈이로구나” 얼마나 멋진 풍경이고 게송인가.
대략 200년 후 그 풍경을 난 바라보았다. 천지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짙은 안개, 몽매한 얼굴을 쓰다듬는 듯 와 닿은 미립자의 촉촉한 분위기, 모든 실존을 집어삼킨 무아의 세계, 구분과 경계를 초월한 허허로운 공간, 그래서 오히려 볼 수 있는 저 너머의 象, 여기서 난 우주의 시원을 느꼈듯, 숭늉처럼 구수한 어머니의 맛과 멋이 아닌 또 다른 ‘樂’과‘恨’을 지각하고 감각 했다.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의“노엄 성(Norham Castle, Sunrise)의 일출”에서 보듯 해 뜨기 전 물 위에 피어오른 새벽 안개와 같은 풍경을 두물머리에서 만났다. 높낮이도 없으면서 가늘어지다 늘어지고, 다시 가늘어지며 알 듯 모를 듯한, 그래서 더욱더 짙은 안개 속에서 헤매는 듯한 ‘호롱불 아래 읊조림’에서 어머니의 삶에 대한 시원을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노엄 성의 일출” 속 짙은 안개 너머로 푸른 실루엣의 城이 보이듯 어머니의 구슬프고 애잔한‘호롱불 아래 읊조림’에서‘樂’과 ‘恨’이라는 어머니의 성(城)을 보았다. 그리고 산사의 범종의 울림이 저 멀리 울려 퍼지는 것처럼 어머니의 ‘읊조림’의 여백 속에서 한없는 藝心(예심)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조석으로 싸늘한 계절이다. 기온 차이가 심한 이때쯤, 그 강 위에는 지금도 여전히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하얀 대접의 정한수를 장독대에 올리는 종교 같은 행위와 호롱불 아래서 옷가지들을 꿰매는 일들을 여전히 훗승에서도 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종교를 떠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횡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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