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장주(莊周, 莊子)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재미있게 지내면서도 자신이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 무슨 구별이 있기는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일러 “사물의 물화(物化)라 한다” <제물론齊物論>의 ‘호접몽胡蝶夢’내용.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生死一如’를 보는 듯 하면서 더 나아가 ‘분별分別’과 ‘무분별無分別’을 생각게 한다. 꿈속의 장주와 나비가 나뉘면 서로 다른 개체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장주와 꿈속의 나비는 똑같이 하나다. 즉 현상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양하게 나뉘지만, 본질은 똑같이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장자의 <제물론>이 그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융합원리로서의 물아일체인 도가사상은 주관과 객관의 이원화를 지양하고 상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원론적이다. 장자의 천인합일과 물아일체 등은 모두 우주 만물이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같은 입장에서 보면 만물이 모두 하나라고 할 때 자아와 자연과 하나 됨은 궁극적으로 우주 만물과 융합을 추구하는 도가적 세계관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나비의 꿈(胡蝶夢)’은 천인합일이나 물아일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메타포(metaphor)로 문학이나 사상, 예술의 다양한 측면에 걸쳐 변주되고 해석되어 왔다. 꿈을 소재로 하는 문학작품은 물론 음악, 연극 등 예술 분야에 원초적인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고 인간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종교, 철학 등 시각의 전환에 메시지가 되기도 하였다.
알다시피‘나비의 꿈’은 『장자』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이를 일러 예부터 ‘호접주인夢蝶主人’이라고 했다. ‘나비의 꿈’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남가일몽南柯一夢’ 같은 꿈의 얘기가 아니라 이곳에서 핵심 키워드는 ‘물화物化’이다. 세계는 얽히고설킨 관계이고 돌담에서 보듯 나는 너를 이고 너는 나를 지고, 나는 너를 베고 너는 나를 안고,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기도 하는 상호침투, 상호합일의 세계이면서 不一不二가 병존하는 세계이다. 장주와 나비와는 어떤 구별이 있을 것이지만, 결코 장주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주가 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 변화하고 연기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보면‘물화物化’는 모든 존재의 현상은 여러 원인(因)과 조건(緣)에 의해 생겨난다는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과 상통하지 않을까 한다.
거실 한편에 있는 청화백자 도자기를 바라본다. 고운 태토와 도공의 바쁜 손발 놀림이 보이고, 불가마에서 눈물처럼 흘러내린 유약과 빙렬이 보인다. 이렇게 바라보니 도자기는 도자기 아닌 요소로 만들어진 것이 된다. 이렇듯 도자기와 흙, 도자기와 도공, 나비와 장자, 장자와 나비는 서로 넘나드는 자유자재의 상관관계이다. 도자기는 도자기가 아니라 도자기는 불과 흙과 도공이다. 이런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물화’가 아닌가 한다.
또한, 장자의 문장은 자유분방하면서 기기묘묘하기도 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중국에서는 장자의 문장력을 통해 출중한 문사들은 문장의 힘을 길러왔다. 소동파, 이백, 도연명 등등 그 외도 많다. 문학이라는 분야가 정치와 윤리·도덕 등을 떠나 하나의 독자적인 근대적 문학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사상이 뒷 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胡蝶夢’을 보더라도 세계적인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 <나비의 꿈>이라는 오페라를 만들었고, 또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통한다. 인연인지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 클래식 곡은 불면증으로 힘든 러시아 백작 카이저링크를 위해 작곡한 곡이다. 한마디로 잠을 자게 해서 꿈을 꾸게 하는 곡이다. 마르틴 부버 역시 『장자』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실존주의 거두 하이데거 또한 장자를 좋아했다.
장자의 물아일체와 융합원리의 측면에서 고산 윤선도의 <산중신곡> 연시조 6수 중 3번째 시조를 보고자 한다.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러하랴.
말씀도 우움도 아녀도 이내 됴하 하노라. <만흥漫興 3>
벼슬에서 물러난 고산은 살면서 자연에 묻혀 동경하며 노래할 수밖에 없는 심정을 읊조렸다. 모든 시비와 분별을 넘어서서 먼 산과 일체를 이루는 경지에 이르니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즐거움이 거기 마련되어 있다. 그는 말이 없는 자연이 그리운 임보다 더 정답다는 인식을 통해서 고산은 자연 속에 완전히 동화되어 물아일체, 물심일여(物我一體, 物心一如)가 된 경지를 노래하는 점에서 장자의 ‘물화’를 떠올리게 한다.
끝으로, 어느 날 호랑나비 아님, 흰나비를 사진으로 찍어서 SNS에 올려보고 싶다. 그 사진을 본 대부분 사람은 예쁘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혹여 누군가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 올리며 깊은 사색에 잠기지 않을까. ‘경생상외(境生象外) 말이다.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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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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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165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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