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기억은 좋고 망각은 나쁜 것인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일들에 부딪힐 때 좋은 일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다. 그리고 나쁘고,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는 잊고 싶다. 그러나 모든 걸 다 기억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이러한 측면에서 망각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망각’이라는 단어는 고마운 존재가 아닐까 한다.
‘비움’은 장자 철학의 핵심 키워드다. 여기서 ‘비움’은 부정적인 마음을 해체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 분별과 편견을 버리고 수용하는 것, 그게 장자가 말한 심재心齋와 좌망座忘이다. 나를 비우고 나를 잊은 마음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의 이치를 터득할 수 있기에 세상이 왜곡되어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꽉 찬 마음을 비우지 않고 주관적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제멋대로의 관점이기에 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자는 인위적인 질서를 중요시하는 유학과는 달리 객관적인 자연의 질서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心齋와 坐忘을 제시한다. 심재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벗어던지면 마음이 텅 빈다는 의미이고 좌망은 말 그대로 조용히 앉아 자신을 구속하는 모든 것, 관습화와 제도화된 규율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비슷한 관점의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의식의 문과 창을 잠시 닫는 것, 우리의 잠재의식에 봉사하는 기관이 서로 협동하든가 대항하든가 해서 생기는 소란과 싸움 때문에 방해받지 않는 것… 약간의 의식의 백지상태(tabula rasa) - 이것이야말로 앞서 말했듯이 능동적인 망각의 훌륭한 점이다.” 했다. 이렇듯 의식의 망각을 통해 텅 비워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니체는 의식의 백지상태가 되어야만 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이처럼 니체의 능동적 망각이나 장자의 무아의 경지에 들어선 상태, 즉 망각은 행복함을 추구하는 것과 또한, 기독교에서 자기 비움인 케노시스(Kenosis) 등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가‘감각의 문들(the doors of perception)’이라는 말을 했는데 이 감각의 문을 비워서 백지상태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는 백지상태여야 한다. 또한, 순백의 정신에서 시 한 구절이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정신의 근본으로 가는 길이 된다. 이처럼 ‘타블라 라싸 (Tabula rasa)’에 실린 정신세계에서 문학, 예술 등의 모든 의식은 새롭게 태어나지 않을까. 살아가면서 그 무언가로, 어떤 의미로 비운 삶을 채우려고 한다. 그렇지만, 채우고 부어 넣는다고 해서 채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쏟아부어 텅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 가득 찬 술잔을 비워야 다시금 빈 잔을 채우듯이.
인간은 태어날 때 그 어떤 지식도 지혜도, 분별 의식도 없이 태어난다. 이토록 정신세계는‘백지상태’이다. 소설가 드레 모루아는 “망각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했다. 망각은 망각 후의 새로운 현실에 더욱 잘 대응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낡은 기억과 폐습들을 없애 버리는 자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망각’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을 옭아매고 수 없는 족쇄의 잡념들을 탈탈 털어버려야만 새로운 현실 속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니체의 말처럼 능동적 망각이라고 하는 감각의 문과 창들을 잠시 닫아보고, 그리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온갖 잡념과 욕망에서 벗어나 감각을 배제하면서 정신 수양하는 ‘心齋’와 이성적인 요소를 물리치고 그 어떤 형체와 지식, 앎의 속박에도 구애받지 않는 ‘坐忘’이 뜻하는 장자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하지 않을까.
현대문명 속 삭막한 철조망 끝에 매달린 기억의 표상에만 얽매이지 말고 가끔 ‘망각’이라는 흰 여백에 시와 그림을 짓고 그려보자. ‘망각’의 백지 위에 암자 하나 세워 고독과 새로움의 두 손으로 합장하며 기도해 보자. 그리고 기억이 아닌 망각의 손수건으로 흐르는 기억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보자.
망각을 두려워하지 말자. 망각이 없으면 가득 찬 기억으로 고통스러울 것이다. 오히려 그런 기억의 고통을 망각으로 치유하자.
백지 1/신달자
표백은 없었지만 시리게 깊은 흰빛
다 받아들이고 다 쏟아내는
첫 발자국에 영원히 밟히고
두 발자국에 과거와 내세가 하나의 길로 열리는
그런 선한 길로 접어들고 싶다면
무게도 냄새도 충돌도 없는
정신의 정신을 만나고 싶다면
훌쩍 백지 위로 뛰어내려 보세요
아무것도 없지만 뭐든 있는
(下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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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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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267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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