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글쓰기, 마당을 쓸고 정원을 가꾸다(1)

홍영수 시인(jisrak) 2024. 1. 2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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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 왔다. 그 과정은 글의 마당을 쓸고 닦고 정원의 수목과 화초를 가꾸는 작업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꽃 피울 시기에 맞춰 화초에 물을 주고, 수목을 전지 해 수형을 갖추는 과정이, 글을 짓고 가꾸는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라면, 마당의 잡초를 뽑아주고 흙을 북돋우며 고르는 작업은 퇴고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창작과 퇴고의 결과물로 피는 꽃과 맺는 열매의 작품이 있다. 이러한 열매와 꽃들을 소망하는 것은 꽃의 향과 열매의 농익음의 유무를 떠나서 나만의 충족감 때문이다. 비록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마당에 심어 놓은 다양한 식물과 수목들로 채워진 글의 정원과 마당, 그들이 불 밝혀준 것에 감사하면서 더욱 빛나는 등불을 켜 나가야 한다. 지금 순간에도 자판의 소리는 더욱 조심스럽게 빠르고, 마우스를 쥔 손놀림 또한 좌우상하로 오르내림이 바쁘다. 그럴 때마다 글의 궤적이 생기고 자취가 드러나면서 하나의 문장을, 하나의 작품을 탄생시키는 몰입의 과정이야말로 나를 찾는 길이요 정체성을 발견하며 자의식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 어떤 종류의 글이든 글 쓰는 작업은 고독하다. 그리고, 고립적이다. 독자에게 읽히기보다는 오히려 혼자 감춰두고 싶을 때가 더 많다. 그러면서도 언어의 도구를 사용해 글을 쓰는 것은 내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사고와 지식의 편린들을 세상 밖 드넓은 공간에 던지는 작업이고 그 너머의 세계와 만나는 일이기에 글을 쓴다. 그리고 누군가 매기는 점수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내 안의 자아를 발견하는 작업이어서 좋다.

 

창의적 발상과 개성이 뛰어난 글을 쓰는 작가는 항상 긴장된 자세와 굳건한 자의식을 갖게 된다. 단지 입사지원서의 이력서나, 소개서가 아닌, 오직 나만의 사고와 관점으로 창작해서 독자에게 다가가든 혼자만의 충만함에서든 글을 써야만 하는 작가들, 그들의 세계는 그 어떤 평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벗어나 있다.

 

이렇듯 글 쓰는 작가의 대부분은 어떤 순간에 회의감이나 좌절감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경우, 그래서 방향을 잃고 방황하기에 굉장한 고통과 쓰라린 경험을 하게 된다.

 

글을 쓰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점은 급변하는 시대에, 모든 것을 손안에서 찾고 해결할 수 있고, 또한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라는 그물망으로 얽혀있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는 독서와 글쓰기가 더욱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럴수록 오히려 소외되어가고 거리감을 두는 글을 쓰는 창작에 열중하게 된다. 왜냐면, 다양한 학문의 분야 중에서도 특히 인문학에 대한 그 미지의 세계를 궁구하고 또한, 깊은 성찰 속 고통과 쓰라림으로 글을 써야 하는 것에 자긍심을 갖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복제할 수 있고, 인간 대용의 AI가 실용되는 시대에 살고, 질주하는 듯한 속도로 거리와 차이를 지워가며 살아가는 지금의 인간은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매일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사에서는 물론, 자신의 실존적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무감각해 하는 존재에 대한 불감증에 걸린 시대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에 대해 성찰하고 경이로움을 존치하는 것이 진정한 글 쓰는 행위가 아닐까.

 

그래서 글을 쓰고 읽고 평하는데 두려움이 없다. 그리고 글을 들려주고 다듬어주는 이문회우以文會友들이 곁에 있어 더욱 정진할 수 있다. 또한, 글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하는 내 글 마당의 꽃과 수목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살아온 만큼의 세월로 기록한 비망록의 묘계질서妙契疾書와 수사차록隨思箚錄을 해서 제본해 둔 두터운 퇴적층의 활자들, 그리고 살가운 손길을 기다리는 책장에 수직, 수평으로 서 있고 누워있는 묵언의 책들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문학은 정신과 육체가 방황하는 떠돌이 삶의 피난지인지도 모른다. 문학은 내적 삶의 충일이고 주관적인 창조성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가의 글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읽고, 또는 훔쳐본다. 그래서 아무리 숨고 도망 다녀도 헤어날 수 없다. 글쓰기는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바다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처럼 이리저리 떠다닌다.

 

작가는 자신이 쓰는 작품과 독자와의 사이에서 문학적 갈등을 느낀다. 그것은 독자에게 어떠한 교훈이나 정신적 위무를 줄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독자를 의식한 압박감에서 쓰는 글은 일반적으로 천편일률적인 글이 되기에 십상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이미 지금의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고, 멀어지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인 유희에서는 그 어떤 정신도 고취시킬 수 없다. 이러한 천편일률성은 이미 현시대에는 맞지 않는다. 문학은 연민을 위한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독자는 작품에 대해 준엄한 심판자이면서 때론 동지적 입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명성이라는 하찮은 허울을 뒤집어쓴 작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영혼을 팔아넘기지는 말아야 한다. 심오한 사상가는 오해받기보다 이해받기를 더 두려워한다고 한다. 이에 비유하면 진정한 시인은 난해하다는 얘기를 듣는 것보다는 이해되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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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덕유산 정상' 사진/홍영수. 2009/02/01.

https://www.cosmiannews.com/news/167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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