썰물이 나간 사이
갯벌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작은 게 한 마리
찰진 흙 온몸에 뒤집어쓰고
구멍을 파고 있다
산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일
구멍만큼이나 자기 세상이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완벽을 노력했지만
내 마음 뒤집어 보면 곳곳에 구멍 투성이다.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오고
햇볕도 파고들고
친구도 왔다 간다
더러는 달도 제 짝인 듯 넌지시 맞춰 보는
_ 芝堂 구정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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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다만, 북적거리는 여름 해변보다는 한적해서 홀로 걸으며 썰물 때 드러난 갯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날아든 조류들, ‘드러냄과 들어옴’의 드나듦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시인은 썰물의 갯벌에서 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작은 집게발로 펄을 파고 구멍을 내어 드나들고 있다. 자기만의 삶의 방식이다. 얼마 후 밀려올 밀물, 그 밀물은 또 다시 빈 갯벌을 채울 것이고 영양을 공급할 것이다.
시인은 어느 날 동해의 바닷가가 아닌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 갯벌을 찾았을 것이다. 게의 구멍은 그냥 텅 빈 구멍이 아니고 살아가는 공간임을 알아차린 시인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삶의 구멍 또한 그 크기만큼 이 자기의 세상이고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열린 공간임을 게의 활발한 움직임과 구멍을 파는 현상을 관찰하며 느끼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서재의 책장을 바꿀 때가 있다. 창문을 가린 겨울의 책장을 다른 쪽으로 옮기면 따사로운 햇살이 창 유리문을 통해 방의 빈 공간으로 들어온다. 장자가 말한 ‘虛室生白’이다. 텅 비운 방, 방 한편에서 뿜어 나오는 햇살이라니 얼마나 따사로운가. 이 엄동설한에.
그렇다. 방을 비우니 햇빛이 들어오듯 돌담이 태풍에 무너지지 않는 것은 나는 네가 되고 넌 내가 되며, 서로가 서로를 베고 눕고, 낮추고 얹히며 틈새의 구멍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빈 틈 없는 형태나 색상으로 가득한 회화는 답답하고 부담스럽다. 책잡히지 않고 완벽해지려고 했던 시인, 이제는 너그럽고, 생각과 감상자의 상상력을 통해 스스로 그려 넣고 그림과 대화 할 수 있는 여백의 동양화처럼 자신을 되돌아보며 구멍을 발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멍 아니, 여백의 공간을 의식하고 있다. 친구도, 친척도 비바람도 드나들며 놀다 갈 수 있는 공간이란 멍석, 그것을 펼쳐 놓은 것이다. 펼쳐 놓은 멍석인데 어찌 놀다 가지 않겠는가.
막힘은 질식을 유발하지만 열림은 타인에겐 환희이고 충만함이다. 이렇게 끝없이 열린 상태의 受納적 태도에서 구멍은 뚫리고 공간이 열린다. 썰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다시금 밀물이 채우고 밀물은 썰물을 위해 빠져나가며 갯벌의 공간을 확보해준다. 이렇게 상반된 존재들의 존재 방식을 염계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찾을 수 있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해지는 것이一動一靜(일동일정) 서로 그 뿌리가 되면서 互爲其根(호위기근)’라고 했는데 한마디로 ‘逆의 合一’이다. 상극의 상생이고 다름과 다른 사물들의 상호작용이며 순환하는 역의 세계를 보여준다.
시인은 지금까지‘완벽’과 ‘책잡히지 않음’과 같은 빈 틈 없고 허튼 공간 하나 없이 전인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우연히 떠난 여행길에서 아님, 시인의 예리한 촉으로 구멍을 파는 게를 보며 자신을 살피면서 ‘완벽’의 대극이라 할 수 있는 ‘부족함’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바닷물의 드나듦은 달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이다. 이것을 알고 있는 시인은 1연의 썰물과 마지막 연의 달을 마음속에 병치시키고 있다. 그러면서 더 많은 구멍과 틈새와 공간을 내어 채움의 발걸음을 기다린다. 다른 듯 다르지 않은 ‘逆의 合一’로 설명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네가 반 웃고 내가 반 웃고’는 언젠가 어느 현수막에서 보았던 글이다. 그렇다면‘네가 반 비우고 내가 반 비우고’ 나면’ 너와 나의 삶이 채워지지 않을까. 구멍과 확장성의 공간이 필요한 삶, 완벽함은 부족함의 또 다른 이름이고 부족함은 완벽함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리스트(인문학)
구정혜 시인 <아무일 없는 날> 출판 기념회 2015년 8월 19일
(2022년 2월 20일 작고, 삼가 하얀 그리움 한 송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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