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평론

엄마의 가을/김옥순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1. 29.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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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니를 두고 놀러 나갔다
종일을 잇몸으로 살고
저녁 식탁에도 잇몸으로 앉는다

공원에 간다고 부채는 한 보따리 챙기고
옷은 반소매 위에 가을옷 
모자 밑으로 땀방울이 주르르

염색은 아흔여섯까지 하겠다더니
아직 아흔셋인데 말이 없다
밥을 한 끼니도 안 먹었다고
난처하게 하고, 꼭 챙기던 용돈도
이제는 챙기지 않는다.


시집 <11월의 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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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가을’ 詩題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여성은 생물학적 性이다. 여성과 남성 외에 또 하나의 性을 정의 하고 싶다면 필자는 당연히‘엄마의 性’, 즉 ‘母性’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의된 여자로서의 성이 아닌 모성은 여자의 성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한정시킬 수 없는 ‘엄마의 성’이다. 어쩜 모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저 너머의 그 무엇인 것이다. 그래서 ‘엄마’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가엔 물기가 서리며 입시울이 떨린다. 

‘가을’은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고 결실의 계절이며 단풍의 계절이다. 그래서 때론 숙연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을은 소멸과 죽음의 계절이다. 약동하는 희망의 봄, 푸르게 성숙시키는 여름, 그리고 가을, 이후의 풀벌레들은 본향인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 그 섭리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백의 시에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다(夫天地者 萬物之逆旅)’라고 했듯이 우린 잠깐 동안 이 세상을 빌려 살다가 돌아가는 것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인’이라 하면 구시대적 가치관과 굳어진 사고가 뿌리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硬化된 시간은 노인들에게는 그 자체가 존재다. 노인을 노인으로만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매 순간 누구도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시인은 치매에 걸린 구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 같다. 점점 잃어가는 기억력과 예전 같지 않은 행동의 패턴들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보이는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자. 어쩜 시인은 눈앞의‘보임’이 아닌 그 너머의‘감춤’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부채는 구순 할머니 세대에는 더위를 날리는 도구 외에 낯선 사람이나 특히 남자를 만날 때는 얼굴 한 면을 다소곳이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 또한 여성스러움의 품위 유지였고 몸에 밴 행동이었다. 부채 몇 개를 챙기는 것에 무게를 두지 말자. 그 시대, 무의식 속에 잠재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여름에 반소매의 옷을 입어도 땀이 줄줄 흐를 지경인데 그 위에 여름옷도 아닌 가을 옷을 입으셨다니. 필자의 어머님이 살아계셨다면 올해 92세가 된다. 이 시대의 여인들은‘감춤’이라는 생래적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땡볕 더위에 옷가지 하나 더 준비해 덧입는 것은 무더위에 앞서 살갗 하나 보여서는 안 되는 시대적 배경에서 드러난 철저한 자기관리의 다름 아니다. 

비록 구순의 나이에 풀어헤쳐 헝클어진 은빛을 이고 바늘귀가 헛보일지라도 어찌 확 벗어던져 노출 시킨 서양 것들과 비교하겠는가. 욕망과 욕정을 단속하고 감싸는 견인주의(堅忍主義)적 저 여인네의 은근미 앞에, 남몰래 흐른 눈물 깨물어 옷고름에 적시는 엄마 앞에, 소리 내어 웃지 못한 웃음은 슬몃 뒤돌아서 손등에 떨어뜨린 우리들 엄마 앞에.

틀리를 두고 나가고, 염색할 것을 잊고, 용돈을 챙기지 않는다는 것들을 목격하면서 육체적 정신적 혼란을 겪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끼고 있는 시인. 그러기 이전에 그 시절 삶의 방식을 되새겨 보면 보이지 않고, 놓치고 있는 그 무엇이 보이고 다가온다. 생물학적이고 경제적인 생계형의 삶과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삶의 현상학적 통찰을 통해‘보임’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엄마의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여성의 삶,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고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다. 새 생명의 잉태로 인한 고통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방울의 물도 흘리지 않고 걸어가는 엄마의 저 숭고한 극치. 콧물감기엔 엄마의 품이 약이고, 영육이 메말라가고 마비되어가는 우리의 혈맥에 청심제가 되어주신 엄마. 우리에게‘엄마’는 새벽녘 햇귀이고 어둑새벽을 깨우는 한 울림의 종소리다.

베토벤은“어머니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라고 했다. 5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고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버림받아 외로웠던 베토벤. 얼마나 어머니와 고향이 그리웠을까. 그의 작품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Beethoven, Piano Sonata No.21, Op.53 'Waldstein')을 들어보자. 3악장은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리라.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리스트(인문학)

 

엄마의 가을/김옥순

엄마의 가을/김옥순 / 부천시, 경기도 와 국회의 뉴스 그리고 삶을 전하는 지방신문

www.thenewso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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