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빛
한 웅큼
툭 떨어진다.
심장
덩어리 하나
서녘 노을에
짙게 물들며
때가 되어
지구 위로
낙하하는
저
숭고한
찰나의 긴 별리.
‘동백꽃’의 꽃말을 열정적 사랑(붉은 동백) 혹은 비밀스런 사랑(흰 동백)이라 하는데 그보다는 ‘깨끗한 죽음’이란 의미가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다른 꽃과 달리 ‘동백꽃’은 꽃봉오리 채로 어느 순간 툭하고 떨어져버리기 때문이다. 꽃이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그 흔적도 찾기 힘들다. 멀쩡하게 잘 피어 있다가 어느 순간, 툭 하고 떨어져버리는 동백 — 그래서 노인들 방에 ‘동백꽃’ 화분을 두지 말라고 한다. 동백꽃이 질 때, 바로 꽃봉오리 통째로 어느 순간 툭 떨어질 때 노인네들은 가슴까지 철렁 내려앉는단다.
홍영수의 시 <동백꽃>에는 ‘동백꽃’의 그런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깨끗한 죽음’이란 꽃말의 의미를 달리 해석한다. 보다시피 단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를 줄글처럼 이어 읽으면 별 감흥이 없다. 그런데 13행으로 나누어 읽다 보면 시인이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알 수 있다.
‘핏빛 / 한 웅큼 / 툭 떨어진다.’고 했다. 꽃봉오리가 통째로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의 낙화 모습이다. 이렇게 제시를 해 놓고는 그 의미를 부여한다. ‘핏빛 / 한 웅큼’인 동백꽃이 ‘심장 / 덩어리 하나’로 묘사된다. ‘심장 덩어리 / 하나’가 아니라 ‘심장 / 덩어리 하나’이다. 행갈이를 통해 덩어리 즉 꽃봉오리 통째란 의미가 강조된 것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서녘에 노을이 질 때는 저녁이다. 인생의 황혼기라 해도 될 것이다. 붉은 동백이 노을빛에 더 붉어질 것이다. 그리고 꽃이 떨어진다.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 위로 / 낙하’한다. 시인의 눈에는 단순히 꽃이 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공간에서 지구로 떨어지는 것이다. 지구로 떨어진다? 바로 현실이다.
여기까지는 그저 행갈이만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 3행을 읽으면 무릎을 치게 된다. ‘저 / 숭고한 / 찰나의 긴 별리’라니. 이별(離別)은 단순히 ‘헤어지다, 나뉘다’를 말하지만 별리(別離)는 ‘따로 떼어놓다’는 뜻이 강하다. 우주의 기운일까. 그러니 숭고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찰나’와 ‘긴’ 시간이 대비된다. 꽃이 떨어지는 시간은 찰나이지만 떨어진 다음은 ‘긴 별리’일 것이다. 숭고한 것은 ‘찰라’일까 아니면 ‘긴 별리’일까. 답은 독자의 가슴속에 있다.
동백이 꽃봉오리를 맺어 꽃을 피울 때 그것은 이상향을 그리는 것이 되지만, 일단 꽃이 져서 땅에 떨어지면 그때는 현실이 되고 만다. 이상에서 현실로 오는 시간은 ‘찰나’의 순간이고 현실 속에 살아가는 것은 ‘긴 별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런 모든 것이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동백꽃이 지는 모습을 보고 이런 우주의 기운까지 느낄 수 있을까. 하긴 그러니 시인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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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동백꽃
https://cafe.daum.net/nurimunhak/CEQT/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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