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가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재즈의 선율이
내 온몸을 휘감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고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그려보고
저녁에 만나는 순간까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나와 그 순간이 약속된 이여!
나와 하나 되기로 선약된 이여!
사랑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는
죽어서도 잊지는 말자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시집 「카카오 스토리」, 산과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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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장르 자체가 다의성과 시인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제의 의미는 결혼하는 날을 의미한 것으로 읽히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읽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든 젊은 남녀 간의 만남이든. 남녀 사이의 사랑 행위를 보고는 부처도 돌아앉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른 아침의 공기가 예전과는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다. 평소의 공기가 아니고 고급의 산소가 있다면 최고의 산소를 마시는 기분일 것이다. 때마침 재즈의 선율이라니. 들뜬 기분을 업그레이드시킨다. 아마도 마일즈 데이비스나 찰리 파커, 아님, 디지 길레스피 등 재즈 뮤지션들의 선율이 아니었을까 한다. 산뜻한 아침에 들리는 트럼펫이나 색소폰 소리를 몸에 휘두르고 집을 나선다.
2연에서는“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는 어린 왕자의 명대사를 생각나게 한다. 시인은 저녁에 만나기로 한 약속에 이른 아침부터 행복해지고 있다. 아침 식사는 굳은 빵이 아닌 갓 구운 부푼 사랑의 빵을 씹는 중이다. 행복의 부피는 터지기 일보 직전의 작은 풍선이 아닌 창공에 띄운 애드벌룬만큼이나 팽팽하게 부풀고 있다.
평생지기의 반려자가 될, 아니면 사랑하는 여자이든,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데 어찌 설레지 않겠는가. 그녀의 수줍음에 홍조 띤 모습을 생각하며 기대감 속의 벅찬 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견고한 이성의 벽이 풍선처럼 부푼 흥분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럴 때는 이성이 감성에 묻혀봄 직하다.
문학사가들이 저주의 작가라고 분류하는 조르주 바타유는 인간 사회에서 두 가지 무질서를 든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다. 에로티시즘과 죽음, 이 둘은 둘이 아니고(不二) 하나라고 한다. 한마디로 에로티시즘의 순간은 죽음과 같은, 작은 죽음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삶의 충동을 에로스로 불렀던 것과 짝을 맞추어, 마르쿠제는 죽음의 충동을 죽음의 신 이름을 따서 타나토스라 불렀고, 이후 이 둘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로 불리기도 한다.
몸은 불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성을 추구하게 된다. 존재의 연속성을 위해서는 불연속적인 존재끼리의 결합을 통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절정의 순간, 엑스터시의 경험을 하게 되는 성적 결합이다. 그렇다. 3연을 보자. ‘순간이 약속’되고, ‘하나가 되기’그리고‘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 등에서는 곧 결혼 첫날의 꽃잠을 의미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황홀경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존재의 연속성을 구현코자 한 것이리라. 에로티시즘은 시와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를 통해 ‘너와 나’로 연속적인 존재가 되기 때문에.
미술에서 영원한 주제는 에로티시즘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쉴레 등등,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가 문학에서도 서정주의 시‘화사’나 고려가요의 남녀상열지사인 ‘쌍화점’ 등 많은 고전 문학, 미술 작품에서도 에로티시즘이 주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조신 시대 가사의 대가인 송강 정철이 기생 진옥과 나눈 에로틱한 시 한 편을 보자
옥이 옥이라 커늘 반옥(半玉)만 너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진옥(眞玉)일시 적실(的實)하다.
내게 살송곳 잇던니 뚜러 볼가 하노라
송강 정철(鄭澈)의 노래가 끝나자 가야금을 뜯던
진옥(眞玉)은 기다렸다는 듯이 응수하기를......
철(鐵)이 철(鐵)이라커늘 섭철(攝鐵)만 녀겨떠니
이제야 보아하니 정철(正鐵)일시 분명하다.
내게 골풀무 잇던니 뇌겨 볼가 하노라.
예술에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너무 관능적인 것을 추구할 때는 저속하게 느껴져 성적 욕망을 자극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지적인 개입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불필요한 시어를 없애고 화려하지 않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솔직담백한 시적 진술로 관능적 에로티시즘을 넘어서고 있다.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난 당신 안에서 당신을 찾고
내 안은 당신으로 넘치고 싶습니다.
당신은 내 삶의 연속입니다.
사랑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아야 하듯 틀에 박힌 연주 스타일을 벗어던진 비밥 시대의 재즈 한 곡을 듣는다. Miles Davis의 ‘So What’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jisrak@hanmail.net
유부식 시집 「카카오 스토리」, 산과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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