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 길었던 해
아버지 가슴도 논바닥처럼 타고 있었다
비단실 같은 빗줄기 촉촉하니
쟁기를 지고 멍에 메워 큰 소를 앞세우고
논으로 가신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주 한 사발
소에게 먼저 권하며
힘들지
해 그림자에 비치는
논고랑은
예서체를 펼쳐놓은 것 같다
모를 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을
눈물이라도 찔끔 고이면
행서체로 내가
써레질해야지.
시집 『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산과들, 2018.
한 가뭄에 타는 논바닥, 갈라 터지고 흙먼지 일으키는 논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엷은 홑바지를 입은 아버지와 헐렁한 몸빼를 입은 어머니가 일구는 농사철, 알바도, 시간제 근무도 없었던 시절엔 곡식 한 알, 채소 한 포기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산골 다랑논은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이었다. 시인은 강원도 삼척의 두메산골에서 어렸을 땐 농사를 지었다. 지금은 시인이면서 서예가로서 한 획을 긋고 있다. 그래서 떠 올리는 것이 모내기철 논갈이와 써레질을 行筆에 빗대어 시상을 전개한다. 시란 관념적인 것보다 체험적인 요소에서 탄생할 때 더 잘 쓰이고 빛날 수 있다.
농부에겐 한 해 논밭의 수확은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그야말로 삶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 큰 가뭄이라도 들면 가슴이 타들어 가고 미어질 수밖에 없다. 이 때 내리는 비는 비록 비단실처럼 가느다란 빗줄기지만 一滴甘雨가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논바닥을 촉촉이 적셔주어 아버지는 급히 쟁기를 짊어지고 나선다.
지금은 이앙기, 트랙터 등을 이용하지만 당시에 다랑논은 오직 소와 사람의 힘으로 일구는 농사 방법이었다. 논갈이 할 때면 가끔 보습이 깨져 나가거나 찌그러지면 낭패를 보지만 그래도 볏에서 볏밥이 곱게 갈리며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농부의 눈길엔 어느덧 풍년을 예약한다.
농사는 육체적으로 힘든 노동이기에 가끔 쉬어야 한다. 자신의 휴식을 떠나 오직 한 살림 밑천이요 저당 잡힌 대학 등록금인 소를 위함이다. 부리망을 벗겨주고 먹이를 주며, 텁텁한 한 잔 술도 소에게 먼저 권하는 것이다. 소는 가축 이전에 가족이었다. 그리고 영물이었다. 그래서일까 불교에서는‘심우도(尋牛圖)’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아 마음을 깨닫는 과정을 목동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하여 그림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종삼 시인의 시 한편을 보자. ‘묵화(墨畵)’이다.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쟁기 끝에서 곡식 영근 소리를 들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시인은 훗날 서예의 대가가 되어 豪端有聲, 한지 위의 붓끝 놀림에서 바람 소리를 듣는다. 한 사람의 삶과 예술관이 일치할 때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꾸민 감동은 가짜다. 삶의 체험에서 나온 감동은 보고 읽는 이에게 빠른 감화를 준다. 고통의 골목을 지나지 않고 어찌 환희의 광장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시인은 논이라는 한지 위에 쓰인 예서체의 논갈이를 보고 있다.
쟁기질 후, 모내기하기 위해선 논바닥을 고르게 해야 한다. 이때 사용된 농기구가 써레이다. 어린 나이에는 모내기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몫이 아니다. 초보자가 해서가 아닌 초서에 가까운 행서라니, 아마도 써레질이나 쟁기질은 단정한 해서체 보다는 좀 흘려 쓴 행서체가 나올 것이다. 아니, 초보 써레질의 運筆이 서툴러서 行書가 될 것이다. 그렇다 점 하나, 획 하나가 사람의 신체조건에 해당 하듯 시인은 永字八法을 익히고 六書에 깊이 다가섰을 것이다. 삼척의 화전 밭뙈기와 층층 다랑논의 서체를 기억하면서. 시제를 ‘운필運筆)로 하고, 그리고 그 서체의 주인공인 아버지를 떠 올리고 있다. 말 없음의 큰 울림으로 깨우침을 주셨고 빛 없음으로 빛을 발하셨던, 언제나 빛나지 않고 빛나셨던 眞光不輝 의 아버님!
삶에서 일하는 행위는 인간에게 있어 근본이다. 그 행위 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는 중요치 한다. 다만, 농사짓는 노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이며 신성한 노동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농작물을 평생 일구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아버지는 대표적 ‘호모 라보란스(Homo laborans)이다.
필자의 아버님도 본인이 쟁기질 하셨던 그 밭에 땅보탬이 되어 계신다. 낮에는 논밭갈이 하시고 이 시간엔 곤히 주무실 것이다. 三更이다.
“그때는 시골 살림이 너 나 없이 가난하여 배불리 밥 먹는 것이 우선순위였을
지도 모른다. 동쪽 하늘이 붉어지기 전 화전 밭뙈기 쟁기질하는 소를 몰고
아버지 따라나서면 해거름이 되어서야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온다.
사랑방에는 장죽을 탕탕 터는 훈장 앞에서 글 읽는 소리가 노래, 그이상의
연주보다 아름답다. 아무리 농사일이 힘들어도 책을 펼치고 있는 아들은
밭으로 부르지 않았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은데 심통을 부리면 “나중에
성한테 배우면 되지 아버지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가난이 켜켜이
쌓여도 부모님은 쇳덩이도 녹일 기세였다.“ -시인의 어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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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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