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지인과의 만남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몸은 진실하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아하! 체험’을 했다. “직접 몸으로 체득하는 체험적 요소에서 우러나온 글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는 얘기 중에 나온 말이었던 것 같다. 특히 필자는 책을 읽는 도중에 무릎이나 머리를 가볍게 치면서 ‘아~하’라고 나도 모르게 작은 감탄사를 뱉을 때가 가끔 있다. 참고로 이 글에서의 ‘몸’은 ‘육체, 신체’를 뜻한다.
인간은 노동을 한다. ‘호모 라보란스다 (Homo laborans)’다. 이 말은 삶을 위해 일하는 행위는 인간의 가장 근본이고 그러한 육체적 노동의 행위는 그 어떤 종류의 노동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몸을 활용한 노동 즉, 농사짓는 일이나 건설 현장, 공사장 등에서의 노동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며 신성하고 근엄한 행위임은 틀림없다.
미래학자들이 21세기를 좌우할 신지식인, 즉‘호모 날리지언(Homo Knowledgian)’의 인간군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보다 더 무서운 빅테크들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바로 ‘호모모빌리쿠스(homo mobilicus)’나 ‘포노사피엔스(Phono Sapiens)’들이다. 한마디로 휴대폰 자체를 생활화한 신인류를 말한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의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몸의 노동이 사라지고 폄훼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신적 분야의 행위 또한 몸의 행위와 언어가 가장 기초가 되기에 비록 새로운 인간군이 출현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노동의 가치만큼은 저 평가될 수 없다.
옛적 원시인들은 수 없는 이동과 움직임의 부딪침에서 불을 발견했다. 이렇듯 쟁기질이나 호미질, 공사장 등에서의 육체적 노동은 신체 곳곳에 옹이의 굳은살을 박히게 한다. 그들은 굳은살에서 희망 섞인 삶을 추구한다. 그 옹이는 순수의 옹이이고 진실의 굳은살이다. 이렇듯 지금도 몸의 부딪침에서 삶 속 생명의 불꽃은 타오르고 몸을 사용한 노동자의 땀방울에서 삶의 진실과 무게를 발견한다.
탐화봉접探花蜂蝶이라는 말처럼 벌과 나비는 그들이 얻고자 하는 꿀을 위해 최상의 날갯짓을 하며 몸을 이동하면서 꿀을 얻는다. 벌은 한눈팔지 않고, 직선적으로 날아들어 꽃에서 꿀을 따고, 나비는 곡선의 날갯짓으로 꿀을 딴다. 벌 나비의 꿀을 위한 날갯짓과 촉수의 움직임, 어찌 진실함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온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노동자들도 직선적 환경이든 곡선적인 조건이든 임금과 화폐를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벌과 나비와 같다고 할 때 노동자들 몸의 언어는 얼마나 순수하고 진솔한가. 그 어디에도 가식과 속임이 없는 진솔한 몸놀림이 아닌가.
일반적으로 ‘노동’하면 몸으로 때우는 단순한 육체적 노동, 건설 현장이나 공사장에의 일용직 등으로 일하는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여긴다. 물론 사무직 등도 노동에 종사한 것임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노동자’라고 하면 피고용인으로, 낮은 대우와 임금의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토록 진실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언젠가 티브이에서 범고래가 다른 고래를 사냥하는 것을 보았다. 닥치는 데로 살육을 즐기는 듯한, 바다의 범죄자, 그들은 엄청난 피지컬을 활용해 사냥한다. 찢긴 먹이를 보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도 온몸으로, 육체적 행위(노동)를 하면서 삶을 위해 먹이를 사냥한다는 것은 약육강식의 논리 너머의 생존을 위한 행위의 처절함 속 신성함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야생의 사자를 보자. 새끼를 위해, 자신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온몸의 근육을 사용하면서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조심조심 한 발자국, 그러다가 목표물이 가시권에 들어오면 온몸을 다해 뛰어가 사냥감을 넘어뜨린다. 그래서 얻은 결과는 가쁜 숨과 축 늘어진 근육, 이빨에 낀 고깃덩이, 털에 묻은 피의 흔적들이다. 차라리 이러한 모습이 생존의 본능이고 삶의 본질이 아닌가 싶다. 먹이 사냥이 끝나고 그늘에 쉬고 있는 사자들의 한가로운 모습보다는 오히려 피 묻은 그들의 입가의 모습에서 추할수록 아름다운 역설의 추미醜美를 떠 올린다면 이상한 걸까?
이렇듯 자신의 신체조건을 최대한 활용해 피 튀기는 먹이를 사냥하는 과정이 더 순순하고 진솔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몸(짓)의 활용은 살아있음의 증거이고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몸(육체)의 언어 또한, 진솔한 삶의 표현이고 고결한 행위이다.
‘몸은 진실하다’에서 생물학적, 물리적인 측면을 결코 정신적인 측면과 비교 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몸뿐만 아니라 정신과 감정 등의 경험과 인지는 다양한 측면에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듯 ‘몸은 진실하다’라는 주장을 하기 전에 정신과 감정, 몸과 사고 등의 다양한 측면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하면서 의미를 찾아야 하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한 사람은 그 자체가 행복함은 물론이다.
요즘처럼 실체는 없고 형용사나 부사 같은 수식어만 넘쳐나는 시대,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수렵과 노동의 원시시대에는 수식어는 없고 실체만 있었다. 그것이 바로 몸을 이용했던 ‘몸의 언어’, 그것은 진실함의 언어였고 순수와 본질적인 몸짓이었다. 지금도 ‘몸의 언어’는 그렇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
https://www.cosmiannews.com/news/223131
'나의 인문학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詩적인 삶을 위해 리듬을 갖자 (0) | 2023.07.27 |
---|---|
미음완보微吟緩步, 사색의 숲길을 거닐다. (0) | 2023.07.17 |
비움, 그 장엄한 희열 (1) | 2023.06.26 |
여행, 잠든 동사(動詞)의 고삐를 잡아당기자. (0) | 2023.06.19 |
노마드(nomade)적 視線 (0) | 2023.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