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으로의 여행에서 눈앞에 나타난 현상, 그 자연의 현상인 풍광은 상념에 사로잡히게 한다. 내가 바라보기 때문에 풍경이 다가오는 게 아니라 낯선 자의 시선과 발걸음에 풍경이 스스로 다가와 자신에 대한 모든 것들을 나에게 전해주는 느낌이다. 얼마 전 강원도 양양지방의 폐사지 두 곳을 답사했다. 바라던 대로 두 곳 모두 답사객, 여행객 한 명 없어서 좋았고, 필자 또한 혼자여서 더욱 좋았다. 텅 비어서 휑한 느낌마저 들고, 오히려 스산한 듯한 분위기에 서 있는 석탑과 흩어진 와편들에 감정을 이입해 교감하면서 천 년의 숨소리와 전혀 녹슬지 않고 어눌하지도 않은 그들만의 언어로 무언의 소통을 할 수 있었다.
천 년 전의 시간의 품으로 들어갔다. 기억의 사원, 지금은 폐사지로 잠든 시간의 땅이다. 난 그 역사의 폐사지 앞에서 엷은 숨소리로 석탑의 틈으로 기어들었다. 역사의 유적지인 이곳에서 빈 마음으로 허공 속 망각의 신라적 폐사지를 바라보며 상상 속 이미지를 떠 올려보았다. 꼽발로 서 있는 주변의 수목들은 천년 세월로 좌정하고 있는 석탑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듯하고 금당 터에는 108배를 올린 굽은 허리와 꿇은 무릎들이 다시금 곧추세우고 있는 듯했다. 추녀마루의 풍경風磬은 바람을 맞이할 생각도 없고 바람 또한 스칠 생각도 없는데 허공에 매달려 고요 한 잎 물고 있으면서 바람이 불면 소리 꽃을 피우는 모습이 들리고 보였다.
이러한 심혼의 풍경들을 휑한 폐사지 한 편에서 그 이미지를 형상화 한다는 것, 이 또한 여행자의 독락獨樂, 즉 ‘홀로됨의 즐거움’이 아니던가. 다른 여행지로 가려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무릎이 삐끗하며 아팠다. 방금 보았던 석탑은 천년 세월 서 있으면서 허리도 굽지 않고 관절염도 없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저 폐허의 적막 속에서 무념무상無想無念의 자세와 무아無我의 깨달음에서 오는 것은 아닐까?
새롭게 눈에 마주치고 옷깃을 붙잡는 미지로의 여행에서 만난 풍경에 대해서는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벗어던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 없이 숲속에 젖어 들면 허리끈도 풀리고 구두끈도 풀린다. 그때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고 나 또한 다가갈 수 있다. 몸과 마음을 비집고 들어오는 그 무엇, 여행의 참맛이며 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험은 ‘바람’, ‘눈’, ‘비’와 같은 명사가 아닌 ‘바람이 불다’, ‘눈이 내리다’, ‘비가 내리다’처럼 동사적 사고와 시선에서 온다. 그것은 움직임이고, 떠남이다. 나그네요 방랑자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시는 움직임 속에서 정적을,/정적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그네와 방랑자가 되어 떠난 여행은 “명사 속에서 동사를/동사 속에서 명사를 찾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여행길에는 낯선 마주침에서 오는 경계심과 모험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지만 무엇보다 새로움과의 부딪힘에서 오는 즐거움이 가장 크다. 그렇기에 여행은 굳이 갈 곳도 머물 곳도, 때로는 나마저도 잊고 떠날 때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폴 세잔은 “풍경이 내 안에서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그 풍경의 의식이 된다”라고 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역과 다소 생소한 아님, 전혀 새로운 광경을 목격할 때, 그 광경은 내가 바라보기도 하고 스스로 다가오기도 하면서 교감과 공감이 이루진 것 같다. 이럴 때 특히, 혼자만의 여행에서 느끼는 희열과 알 수 없는 정서의 만족감, 폭발할 듯한 환희는 어떤 행위에서도 잡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여행에서 얻는 값진 경험이다. 이렇듯 욕망으로 들끓는 세속의 한가운데서 헛헛하고 짊어진 무게를 벗어버리고 싶을 때, 떠나는 여행길에서 만난 다양한 자연 풍광들은 세속의 들끓었던 욕망과 질투와 성냄과 시기 등을 잠재울 수 있다.
때론, 목적을 잊거나 포기한 일을 가끔 만나게 된 경우가 바로 나그네가 되어 떠나는 여행길이다. 원효와 의상이 당나라 유학 가는 도중에 1,300여 년 전에 마신 해골 물, 그 해골 물의 일화는 지금도 뭇 중생의 타는 갈증에 한 모금의 광천수가 되고 있다. 당시 당나라는 신지식의 메카였기에 지금 같으면 선진 외국에 유학길을 떠나는 여정이었다. 그렇지만 뜻밖에 모르고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을 마셨다. 여기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후 심경에 변화를 일으켜 유학을 접었다.
또한 고산 윤선도는 병자호란 때 인조의 굴욕적인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어 제주도로 은거하러 가던 중 아름다운 경치의 보길도에 머물면서 해남을 오간다. 이렇듯 여행은 아니지만, 유학길의 원효와 제주 은거 길의 고산, 그들이 유학과 제주 은거의 목적을 접을 수 있었다는 것은 나그네와 방랑자의 특징과 사뭇 닮아있다. 사실 예수도 공자도 여행의 대가들이었다. 물론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사명감이었지만. 석가모니 또한 세상을 돌아다니며 설법하지 않았던가.
먼지처럼 쌓인 역사 속의 기억들을 망각의 심연에 묻어두고 살다가 문득 빛살이 스칠 때면 홀연히 떠나보자. 오래된 미래처럼 과거가 생생하게 손 내밀며 옷깃을 잡아당기는 유적지遺蹟地로. 가끔은 아니, 자주 떠나자. 나그네가 되고 때론 방랑자가 되자. 그렇기 위해서는 내 안에 잠든 동사動詞를 일깨우고 내면에 드러누운 말(馬)을 깨워 고삐를 잡아당기자, 이러한 일상의 일탈에서 오는 여행은 눈 없이도 풍경이 보이고 귀 없이도 천지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될 때 진정한 여행은 시작된다. 떠났노라, 보았노라, 들었노라, 그리고 돌아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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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https://www.cosmiannews.com/news/2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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