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철학의 핵심은 ‘비움(虛)’이라 할 수 있다. ‘심재心齋’란 실재처럼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심재를 통해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비움’이다. 심재를 실천하게 되면 일상적인 의식 속의 작은 나(self), 즉 小我는 사라지고 새로운 커다란 나(self) 즉, 大我로 새롭게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왜냐면, 가족과 더 나아가 직장,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온통 비우고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더라도 심재를 하게 되면 텅 빈 방에 빛이 뿜어진다는 것이다(虛室生白).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왜곡된 세계가 보이지 않고, 자기만의 관점으로 보는 세계관도 없어질 것이다. 장자의 수양법인 심재좌망(心齋坐忘), 가만히 앉아서 나를 완전히 잊어버리자. 그 ‘비움’의 공간으로 스미고 들어와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수 없이 부딪히는 이웃들의 만나며 접속하고 포옹하면서 새롭게 태어나가 위해서는 나 자신을 비우는‘케노시스(Kenosis)’이어야 한다.
장자‘인간세人間世’에 유도집허, 허자심재야(唯道集虛, 虛者心齋也)에“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마음으로 듣지 말고 氣로 들어라. (……) 道는 오직 마음을 비우는 곳에 모이며 마음을 비우는 것이 곧 재계이다.”라고 했다. 이렇듯 심재란 눈과 귀 마음을 비운 ‘텅 빔’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또한, 모든 감각기관과 지식 등을 부정하고 기운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붙잡고 있는 자의식을 깨끗이 비우고 진정으로 남을 위한 존재로 변화할 때 우린 이웃과 사회, 그리고 더 나은 세계로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인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마찬가지겠지만 깨달음에 다가선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더구나 어떤 목적의식을 갖는다면 더욱 그렇다. 롤랑 바르트가 <기호의 제국>에서 “깨달음은 텅 빈 상태를 만들어 낸다. 말의 텅 빈 상태에서 글쓰기가 이루어진다”라고 했듯이 오히려 깨달음은 텅 빔의 ‘空’, ‘虛’의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깨쳐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예술가 또한 이처럼 텅 빈 공간이나 여백을 메우고 채우기 위해 창작 활동을 한다. 그것은 결핍과 결여된 공간이 없으면 작품이 탄생 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그렇게 탄생한 작품 속에서만 온전한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하듯 우리의 삶도 비워져야 한다. 채우고, 쌓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텅 빔으로 다가가야 한다. 왜냐하면. 텅 비워야 또다시 채워지기 때문이다.
이란에서는 섬세하고 아름답게 짠 양탄자에는 의도적으로 흠을 하나 남겨놓는다. 그것이 ‘페르시아의 흠’이라 하고. 이와 마찬가지로 인디언이 구슬로 된 목걸이를 만들 때는 슬며시 깨진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한다. 그것이 ‘영혼의 구슬’이다
그렇다면, 완벽해야 할 작품에 왜 흠을 남기고 깨어진 구슬을 넣을까.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흠이나, 결점 등을 허물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찌 보면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가지고 있는‘틈새’나 ‘빈틈’의 허점이 하나의 흠일 수 있지만, 결코 흠이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흠이 있는 무결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시골의 돌담을 보자. 그 어떤 강풍, 태풍이 핥으고, 스치고 지나가도 늘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은 돌과 돌 사이의 틈이 있어서이다. 아스팔트의 금이 간 틈새에도, 시멘트 담벼락의 갈라진 틈에도 식물이 자라고 한 송이의 꽃은 피어난다. 틈을 갖자. 그리고 텅 빈 공간을 내 안에 마련하자. 동양화의 매력은 텅 비어 있는 여백의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그림을 그리고 의미를 찾는 것이다. 내 안에도 여백 있는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보자.
‘앎이 없이 안다.’ 말이 있다. 이 말은 마음을 텅 비우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모두 진실로 다가오지만 무언가 가득 채워진 마음에는 알고 모르는 것이 모두 거짓일 수 있음을 뜻하는 바가 아닐까. 앎을 버림으로써 진짜 참된 앎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안다는 의식 없이 아는 것이 참된 앎이라고 한다.
옹기쟁이가 두 손으로 빚은 옹기는 옹기라는 오지그릇을 만들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안의 텅 빈 공간을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공간엔 간장 된장 등을 담을 수도 있다. 몇 년 전에 시골에서 가져온 베란다의 옹기를 바라보며 내 안의 질그릇을 마음속에 만들어 본다. 그래서 내 안을 텅 비운 공간으로 채우려 한다.
가끔 마시는 뚝배기 따른 막걸리, 그 막걸리로 가득 채워진 뚝배기는 더 이상 뚝배기가 아닐 때가 있다. 그냥 막걸리로 채운 뚝배기일 뿐이다. 가득 채워진 뚝배기는 뭔가 덜 채워진 듯 보이고 단숨에 마시고 난 후 텅 빈 뚝배기가 오히려 충만한 뚝배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비움은 채움을 기다리기 때문일까?
어느 날, 모두 떠나고 난 텅 빈 초가집 마루에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았다. 노을빛에 물든 모습, 얼마나 지우고, 버리고, 걷어 내어 저리도 야윈 형상으로 앉아 계실까 생각하다 다시 한번 돌아서 보았다. 그 순간, 그 형상은 숭고한 위대함으로 내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저 깊은 형상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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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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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148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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