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나혜석, 금지된 것을 금지하다.

홍영수 시인(jisrak) 2023. 7. 3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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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예술의 역사는 남성 중심의 역사였다. 여성은 그림의 모델이나 문학작품 속 비련의 주인공 아님, 음악적 영감을 안겨주는 존재였기에 예술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보면 남성보다 여성은 수동적이고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고 하는가 하면 이러한 논리에 반대하는 라캉은 생물학적인 콤플렉스가 남녀 차별을 가져온 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서 오는 편견과 독단에 의한 폭력적 야만적 때문이라고 했다.

 

여성 해방론을 들고나온 미술은, 예를 들어 바바라 크루거와 신디 셔먼 등은 그림으로 표현한 1980년대를 대표적 화가들이다. 여성문제가 폭력적인 대중매체에 훼손당한 여성의 분노를 충격적인 그림으로 담아낸다. 이들보다 다소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또한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문제점들을 폭로하는 것은 물론, 여성의 시각에서 사회적인 이슈를 재평가 재해석하는 등의 글을 여러 잡지에 거침없이 발표한다. 그 대가는 가혹하리만치 혹독했다. 수많은 비판과 욕설, 같은 여성으로부터의 힐난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의 여성관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19481210, 그는 서울 시립 무연고자 병동에서 행려병자로 사망한다. 누구한테도 배웅받지 못하고 53세에 본적 미상, 주소 없음, 착의한 옷 한 벌, 그리고 이름 석 자 나혜석(羅蕙錫, 1896~1948)’ 그녀는 이렇게 세상을 마감했다.

 

비록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세상의 질타를 받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도 결코 자신의 삶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세상에 말을 걸고, 던졌다. 또한, ‘학지광學之光잡지에 대학 2학년 때 양모현처良妻賢母는 여자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면서 비판한다. 이런 허위 허식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꿰뚫고 짚어내면서 주체적인 존재로서 여성으로 서야 한다고 했다.

 

아래의 글 내용은 소설 <경희>에 나오는 부분이다.

첩이 있는 것도 배우지 못한 까닭이고 그것으로 속을 썩이는 당신도 알지 못한 죄이에요. 그러니까 여편네 두고 첩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가르쳐야만 합니다. ” , “계집도 사람이라 해요. 사내와 같이 돈도 벌 수 있고 사내와 같이 벼슬도 할 수 있어요. 사내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세상이예요”,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안 전인류의 여성이다. 오냐, 사람이다

 

경성이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터졌다. 1934<삼천리>라는 잡지에이혼 고백서를 나혜석이 직접 쓰면서이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의 내용이다. 이러한 글은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 도전적 내용이었다. 이어서 폭탄 발언을 한다.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라고, 과히 당시의 사회상을 떠 올리면 상상할 수 없는 얘기다. 목숨 같은 정조를 선택의 문제, 즉 취미라 했다. 이러했기에 나혜석은 문제의 인물이 되어 갔다.

 

그의 아버지는 시흥 군수를 지낸 나기정인데 나혜석 보다 1살 많은 첩을 두고 있었다. 그녀는 이러한 문제를 직접 보고 들었던 것을 소설 <경희>에 썼다. 축첩에서 오는 어머니의 고통과 여성으로서 겪는 처연함에 나혜석은 비분강개하며 페미니즘적 여성관을 확립하는 한 부분의 모멘텀이 되지 않았을까 필자는 생각해 본다.

 

결국 시대의 모던 걸이었던 그녀는 파멸한다. 반세기 동안 부도덕하고 음탕하고 스캔들의 구설에 오르내리는 여자로 낙인찍혔다. 동경 여자미술대학 유학생이었고 당시에 여자로서 드물었던 서양화 전공, 그리고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나혜석은 사실 얼마 전까지 잊힌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조명을 받으며 고양시 화정동국립여성사전시관에는 근대사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열다섯 분 중에 나혜석 이름 석 자가 있다. 마녀재판 받은 사람이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그것은 기억되지 않고 외로운 이단자로 기록될 줄 알았지만, 한국 여성사의 선구자로서 재 평가받는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실 춘원 이광수나 염상섭 김동인 등도 여성의 문제를 소설로 썼다. 그러나 그들은 남녀의 사랑을 다뤘다. 그러나 나혜석은 사랑 얘기가 아니고 여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녀의 시대적인 반항과 여성 해방론의 부르짖음은 한 세기를 지배하는 커다란 동력의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남성 중심과 유교적 이념이 견고하게 지배하던 시대의 형식이라는 지축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거기서 우린 균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봉건적,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 해방론을 주장했기에 어찌 보면 당대 사회적인 검열을 받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문화에 반기를 들고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주의에 항거하는 페미니즘의 문학성으로 탈 남성, 탈가부장적, 더 나아가 모성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경향을 짙게 풍기는 여성 해방론자였다.

 

페미니즘, 이 용어는 사회적 학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보수 전통주의 사회에서 한국의 초창기 여성 문인으로서 그녀가 한국 페미니즘 문학에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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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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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석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