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라며 동네 앞 저수지에서 자주 멱감았다. 그 저수지는 여러 산골짜기와 시냇물이 모여들어 다양한 어류와 수생식물들을 키우면서 아랫녘 벌판 농작물의 생명과 같은 물을 공급한다. 그렇게 사방에서 흘러들어와 모인 곳인 저수지는 뭇 생명들의 종합 영양제이다. 이렇듯 인간의 삶 또한 다양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저수지에서 지식과 정보를 흡입하고 섭취해서 성장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층층 적 다랑이논이 아닌, 오직 한 골짜기에서 흐르는 똑같은 물처럼 단순한 지식과 정보가 아닌, 말 그대로 여러 골짜기 물들이 고인 저수지처럼 많은 식물과 농작물, 어류 등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고 키우듯 다양한 텍스트의 고리와 네트워크에서 관련성을 찾아 새로움을 발견하는 창조적 사고를 해야 할 것이다.
우린 어떠한 그림이나 장면, 현상 등을 볼 때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 보게 된 경우가 많다. 소위 말한 ‘선택적 지각’이다. 우린 순간순간 많은 장면 등과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지각하고 인식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필요한 것만 보게 되는데 이것은 지극히 독단적이고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창의적 시각은 일반인과 다른 그 너머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선택적 지각’의 다른 한편에는‘무주의 맹시(無注意盲視 inattentional blindness)’ 가 있다. 이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 결과 정작 보아야 할 핵심을 보지 못한다. 특히 나이 들수록, 삶이 풍족할수록 그런 경향이 짙다. 각종 매스컴의 발달과 AI 등으로 급변하는 현실 속, 시시각각 끊임없는 변화 속에 세상사가 결성되고 구성되고 해체되면서 다시 재구성되는 시대이다. 이럴 때일수록‘선택적 지각’이나 ‘무주의 맹시’같은 편협하고 단편적인, 배타적이고 왜곡된 일방통행의 시각은 버려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결합하고 재구성해서 총체적 지식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통섭적이고 컨버전스적인 그리고 크로스오버, 콜라보 등과 같은 개념어를 떠 올려야 한다. 다양한 정보와 지식의 차이를 횡단하고 넘나들어야 창의적, 창조적 사고의 싹을 틔워서 움켜쥘 수 있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에디톨로지(편집학)를 통해 “계층적 지식 체계는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한다. 이것은 한 가지 학문적 장르에 멈추지 않고 다양한 연결고리를 만들어 생각지도 못한 예시에서 콘텍스트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창조는 편집”이라고 한다. 정보의 독점 시대는 이미 지났다. 세상의 지식 권력은 수 없는 각종 정보를 어떻게 조합하고 편집해서 창의적, 생산적으로 만드는가에 달려있다.
요즘 인기 있는 유튜브 유명 강사나, 학원강사, 대학교수나 설교를 잘하는 목사 등은 자신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많은 자료를 밑바탕 삼아 분석하고 종합해서 각자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전문가들이다. 다만, 이러한 크로스 텍스트 메이커들에 대해 자기만의 독창성이나 창의적인 측면에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만의 텍스트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예를 들면 조선의 유학자들은 공맹의 텍스트에 얽매인 결과 오직 그들만의 사상이나 이념의 틀 안에서 사유했기에 공맹이나 노장의 사상의 가면을 쓰고 흉내만 내는 겪이 되었다. 이것은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한 크로스 텍스트를 만든 사람들의 능력의 한계이다.
편집은 하이퍼텍스트 구조처럼 여러 가지 문서를 하나의 문서처럼 보여주는 형식이면서 직선형적인 구조와는 달리 다각적인, 즉 비선형적으로 정보에 다가서는 시스템 등의 지식, 정보를 편집하는 가운데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하이퍼텍스트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 정보의 소통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세상을 바꾸고, 바꿔가고 있다. 그것은 기존의 직선적 구조의 길이 아닌 다각적인 시선으로 지식에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의 확장성이 빠르고 또한 상호작용의 속도도 매우 빠르다.
예를 들어 글을 쓴다고 할 때 대부분은 주제에 맞는 많은 자료를 서재에서 꺼내어 책상과 방바닥 위에 그리고 책상 바로 옆 책꽂이 등에 책과 비망록, 그리고 각종 메모 등을 수달이 고기 잡아 여기저기 널려놓은 ‘달제어(獺祭魚)’처럼 사방에 흩어놓고 크로스 텍스트의 자체에 기반을 둔 글을 쓴다.
이처럼 다양한 자료 등의 크로스 텍스트를 통한 지식과 정보 등을 정리 정돈해서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텍스트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한계이다. 자신만의 텍스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텍스트 자체를 해체하고 다시 재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의 알고리즘을 통해 창의적이고 독창성 있는 지식의 습득과 정보를 통한 자신만의 텍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그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권력과 명성, 권위에 대한 텍스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자신만의 텍스트를 만드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곧 창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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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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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24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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