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즉전曲則全, “구부리면 온전할 수 있다”, 뒤집어 말하면 온전 하려면, 구부려지거나 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냇가의 버드나무를 보자. 바람이 불면 휘어진다. 태풍이 불어오면 더욱 휘어진다. 휘고 굽지 않으면 결국 가지가 끊어지거나 아니면, 뿌리째 뽑히고 말 것이다.
이것은 유연한 사고와 융통성 있게 행동하라는 의미이다. ‘휨’이 곧 ‘폄’이고, ‘폄’이 곧 ‘휨’이다. ‘곧음’이 ‘굽음’이고 ‘굽음’이 ‘곧음’이다. 서로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상생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반대의 일치(反對-一致’라는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삶의 현실이다. 어느 한 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라는 생각으로 의연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세상을 오직 자기의 시선으로 한쪽만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이 확고하다. 오직 ‘이것 아니면, 저것’의 하나만을 선택하는 일방통행식의 사고방식이다. 세상을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양쪽의 면을 바라보자. 이러한 트임의 생각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등고자비(登高自卑), 높은 곳을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등산을 좋아했던 필자는 수없이 많은 전국의 명산을 오르내렸다. 당시 등산의 목표는 정상을 밟는 데 있었다. 그 오르는 과정에 1M를 오르면 그만큼의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지고 펼쳐진 만큼 나의 상상력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넓고 두터워지는 것으로 알았다.
대부분 천 미터 이상의 산 정상에 서면 주로 나무들은 높이를 키우기보다는 자신을 낮춰가며 낮은 자세를 취한다. 그것은 그만큼의 바람의 세기와 눈보라, 비바람 등, 자연의 섭리에 순응한다는 것이다. 특히, 높은 산 정상에는 흔히 볼 수 있는 바위와 바위의 틈, 메마르고, 거친 고지대의 토양에서 자란 수목들을 볼 수 있는데 한결같이 휘고 비틀어진 모습으로 서 있다. 서 있다기보다는 틈새에서의 굴곡진 삶의 자세이다.
이러한 모습의 나무 앞에서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끔 오랫동안 머물기도 한다. 그것은 나만의 시간이고 무엇보다 그 어떤 코스모스적인 메시지를 주기 때문이다. 아니, 어쩜 저 생명체들의 삶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 안으로 내가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저 굽고 휜 나무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엔 저들 삶의 방식을 간직한 비밀의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굽고 휜 수목들은 높고 험준한 산맥에서 유난히 많이 볼 수 있는 풍경 중 하나이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서 고육지책으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내린 것이다.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상황, 주변의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만의 길을 걷는 것이다. ‘휨’과 ‘폄’ 속의 생채기이고, 자연과의 교감하는 텔레파시일 것이다.
이러한 모습들과 만날 때는 이성적이 아닌 감성적인 인식으로 바로 볼 때 의미심장함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우리가 보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확 벗어 던지고 이쪽, 저쪽을 함께 생각하는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본질적이 아닌 사물의 본질적인 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들의 진짜 외로움은 나 자신과 분리되기도 하면서 또한, 나와 외로움이 함께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처럼 둘이기 때문에 외롭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바위 틈새의 소나무는 수령은 오래되었고, 키는 작고, 가지는 굽어서 말라비틀어져 있다. 그 앞에 서서 그 안에 스며든 나와는 낯선 타자이면서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냉철한 이성보다 따스한 가슴이 좋은 이유다.
바움가르텐(1714~1762), 일반적으로 철학자들은 감각적인 인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지만, 그는 오히려 수용한다. 시적인 역량과 이성적인 인식은 양립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이성적인 인식으로 바위 틈새에 낀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왜 저 힘든 곳에서, 좁은 틈새에서 싹틔워 자라야만 할까?’처럼 인식도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저토록 힘든 삶에서 인간의 삶의 방식과 자세 등을 유추해 내는 시적인 감성의 인식 또한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결코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반대의 일치가 공존하는 방식이다. 한마디로 감성과 이성의 상반된 인식의 공존 속에서 전인적인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보고 논리적, 체계적,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지만, 감성적이고 의식적인 설득력과 함께 새의 양 날개처럼 조화롭고 균형을 맞추면 좋지 않겠는가. 이때 감정을 이입시켜 느끼는 ‘앎’은 마음을 움직이는 촉매제이다.
시골집에 홀로 계신 구순의 할머니를 보면 하나 같이 몸은 야위고 허리는 굽어 있다. 그리고 옹이진 손과 발, 쓰러질 것 같은 모습과 기름기 없어 윤기 나지 않지만, 결코 윤활유가 필요로 하지 않은 저 숭고한 삶의 자세를 보면서 높은 산꼭대기의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소나무 한그루의 모습이 연상되는 이유는 왜일까. 한때는 굽은 허리가 지금은 휘어있다. 할머니 허리의‘굽음’과 ‘휨’, 과연 대립하는 삶이었을까?
할머니와 바위 틈새의 소나무가 주는 우주적 메시지가 바로 우리들 삶의 궤적을 함께 엮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양쪽으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 둘의 조화, ‘반대의 일치’라는 진리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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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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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단양의 '제비봉'에서, 사진/홍영수 2011/05/01
https://www.cosmiannews.com/news/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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