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누군가의 세상 속에서 ‘나’를 발견하자

홍영수 시인(jisrak) 2023. 10. 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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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물을 인식할 때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분별하고 가치를 지향한다. 특히 창의력에 목숨을 건 문학, 예술가들에게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하는 과정에서 세심한 관찰과 주의 깊은 시선이 필요하다.

 

그 어떤 예술 분야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보다는, 직접 발로 뛰고 손으로 움직이는 현장성과 현실감에서 보고 느낄 때 시와 음악이 흐르고 그림이 보인다. 온통 세속적인 욕망과 욕심으로 가득 찬 이기적 사고에는 좋은 작품이 뿌리내릴 수 없다. 건설 현장 막일꾼의 옷에 적신 땀과 하얗게 맺힌 작업복의 소금기 배인 몸과 옷에서는 시와 서사가 흐르지만, 직접 부딪치지 않고 오직 지시만 하면서 작업의 성과만을 위해 욕심과 욕망으로 업적을 이루려는 그러한 사람에게는 결코 시도 서사도 없다.

 

서사와 시를 만나려고 하면 누군가의 세상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봐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이고 함축적인 시의 세계에 안겨 소통해 보는 것이다. 시어의 움직임을 보고, 시문의 그림을 보고, 작가의 시상을 떠 올려보면서 내 안에 잠든 감각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신선한 감정의 씨알을 주워 보는 것이다.

 

때론, 일상에 지치고 힘들 때 거실 구석에 먼지를 머금고 쥔장의 손놀림을 기다리는 기타를 끄집어내어 현을 튕겨보자, 그래서 고단한 삶에 지친 자신을 위무해 보자. 그러면 희로애락에서 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치며 합창으로 위로할 것이다. 이렇듯 가까운 사물들, 즉 나 아닌 다른 것들의 감정이입에서 또 다른 창작의 모멘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은 나 자신을 알아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지 남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 또한, 나의 문제이고 나로 인해 생기는 것이지 남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문제의 근원적인 것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라고 하는 것은 형이상(形而上)이지 형이하(形而下)의 나가 아니다고 했다. 이 말은 내가 보이지 않고 어딘가, 땅속 깊이 박혀있는 뿌리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풀잎이나 나뭇가지는 형이하일 뿐 진정한 나는 땅속과 바위 틈새에 깊숙이 박힌 뿌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無我라고 했고, 유교에서는 사람의 뿌리는 人生之性本於天 사람의 성품은 하늘이 근본이라 했다. 예수 또한당신들은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소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한다는 것은 하늘이든 땅이든, 그곳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모든 문제의 근원은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 뿐만이 아닌 나를 초월해 타인들의 세계에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

 

에른스트 펴셔는 예술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개별성으로부터 벗어나 삶의 완전성을 확보하게 한다고 했다.” 비단 예술만이 그러하겠는가. 모든 분야의 학문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그렇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부분에 치우치고 갇혀서는 안 된다. 자기만의 생각과 세계 속에 머물러서 자기만의 개별성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비록 사고와 행위 하는 수단과 방법은 다를 수 있지만.

 

예를 들어 말러는 당나라 시에서 영감을 얻었고 고갱은 타히티섬으로 건너가서 비서구적인 것에서 세심한 관찰을 하면서 탐닉했다. 또한 베토벤도 문학에 관심이 많아 셰익스피어의 희극 <팀페스트>에서 영감을 얻었고, 칸딘스키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들으면서 색을 보았다(色聽). 그리고 리스트는 오페라를 위한 서곡으로 <오르페우스>를 작곡했는데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에트루스칸의 화병에 그려진 리라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오르페우스의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살아가면서 타인들의 세상 속에서 몸과 마음끼리 혼융하고 부딪치기도 하면서 대부분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타인들에게서 나는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를 발견하고 를 찾는 것이다. 그곳에 내가 미처 모르는 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때로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각과 사념에 갇혀볼 필요도 있다. 이럴 때 생각과 사념은 미지의 세계를 숨 쉬게 하고 의식을 불어넣을 수 있다. 그때 문학이나 예술작품 하나하나가 우리 삶의 현실을 풍요롭게 만들고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완성된 것이 아닌 쉬지 않고 생성하면서 완성을 위한 과정에 있다.

 

새롭고 창의적인 나를 위해서 매일매일 떠나야 하고, 만나야 하고, 부딪쳐야 한다. 정지된 정착민처럼 멈칫거리는 삶이 아닌, 관습과 통념이라는 틀 속에 갇힌 삶이 아닌 위계질서나 고정관념으로부터 해방되는 노마드의 길을 걸으며 타인과 또는 내 안의 나를 통한 진정한 사유 속에 참나를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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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https://www.cosmiannews.com/news/248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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