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의 발견과 삶의 변론
홍영수 (시인, 문학 평론가)
시인은 하고자 하는 말을 그대로 보이지 않고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를 통해 함축적인 주제를 드러낸다. 그리고 실제 경험이나 상상적인 체험들을 통해 시적 미학으로 호소력 있게 의미를 전달하려고 한다. 또한, 시인은 새로운 발견을 담기 위해서 낡고 녹슨 언어와는 결별해야 한다. 소위 말한 ‘인식의 단절’이다. 시인이 지극히 추구해야 할 것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이 같은 측면에서 정은채 시인은 기존 언어의 기성복을 벗어 던지고, 낡은 규범들을 깨면서 낯선 언어의 조합을 통해 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면서 삶과 세계에 사유의 무늬를 수놓아 우리의 지각에 변화를 주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울음이 오는 건 별일 아니지만
뼛속까지 울음으로 굴러떨어진 양력은
넌더리가 나지 않겠냐고
당신이 물었다.
신파의 연대기를 잘못 삼킨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허기져서
자라지 않는 아이에게 매일 수의를 입히다
차라리
맥락 없는 비릿한 문어체들이
어디론가 가서 실종되길 바랐다
당신은 몰랐겠으나
가끔
시큰거리는 당신이나 생각하면서
봄밤 같은 연애편지나 쓸 걸 생각하다
불안해졌다.
누구냐고
내가 나에게 물어 올 때마다
가장 허름한 곳이 종일 욱신거렸다
-「삼류시인」 전문
뼈를 깎는 아픔과 고통 속, 언어의 열매에 담대한 도전 의식과 진지한 형상화 등을 통해 깊이 있고 잘 여문 한 톨의 시를 수확한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화자는 얘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 “뼛속까지 울음으로 굴러떨어진 양력은/넌더리가 나지 않겠냐고” 묻지만, 자신의 시작(詩作)이 억지스럽고, 통속적인, 과장된 감정 표현의 신파조 시대의 ‘삼류시인’임을 안 화자는 대답을 못 한다. 그것은 저녁에 썼다가 아침이면 찢어버리는‘연애편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시 한 편에는 내용과 형식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것은 시의 주제에 따라 시상의 전개와 구성 방식 등이다. 아직은 정제되지 않고 숙성되지 않은 철부지의 형식에 수의를 입히고(“자라지 않는 아이에게 매일 수의를 입히다”), 어울리지 않고 빗나간, 비릿한 내용들이(“맥락 없는 비릿한 문어체들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이처럼 화자는 “내용 없는 형식은 공허하고, 형식 없는 내용은 맹목이다” 라 했던 칸트의 말을 떠올리게 하면서 시 짓기의 어려운 과정인 절차탁마(切磋琢磨)를 몸소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화자의 자기 인식적이면서 독백적, 고백적 어조로 창작의 힘든 과정을 얘기하고 있다. 제목처럼 어느 위치의 등급이 아닌, “누구냐고/내가 나에게 물어 올 때마다//가장 허름한 곳이 종일 욱신거렸다.”에서 스스로 자문하고 있는 것은, 시 너머의 시(詩外之詩 )에 대한 자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욱신’거림을 느끼기에 가능하고 결과는 시품(詩品)이 곧 인품(人品)이기 때문이다.
설렘에도 뜨거워지지 못해
잊히길 바라는 활자처럼
반복되는 권태와 무료를 돌고 도는
보이지 않는 행성이 된
네가
혁혁한 정신으로
해가 뜨는 이유와
허공을 향해 짖는 개의 봄날에 관해
쓸모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순간이다
-「외톨이」 부분
인간은 바깥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상 밖으로 홀로 내 던져진 피투(被投)적 존재이다. 그것은 혼자의 웅얼거림이고 자유한 존재지만, 한편으로 고독한 존재이다. 이렇듯 화자는 실존주의 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두면서 2연의“사는 건 별일 아니지만/살아 내는 게 누군가에겐 용 해지는 날”처럼 고독한 ‘외톨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특한 존재란다. 그것은 고독한 존재지만 현실에 뿌리내리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 즉 실존을 의미한다.
꽃의 눈부심과 비상하려는 새들의 분주함에 설레지만 반복되는 ‘권태’와 ‘무료’함에 “보이지 않는 행성”이 된다. ‘외톨이’를 ‘행성’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화자와의 유기체적인 동일성을 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반복되는 ‘권태’와 ‘무료’라는 꿉꿉한 공기를 벗어나 해가 뜨고, 개가 짖는 봄날에 대해 유익한 얘기 한마디 하고 싶어 한다.
그 어떤 이상향의 삶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에 만족을 구하는 것에 멈추면 정신적 외톨이가 된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사는 게 별거 아니라는 외톨이 적 시각으로부터 도피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어제는 편의점에 갔지
소주 1병
새우깡 1봉지
정확히 찍힌 내 가난에
바코드가 찍찍 울어주더라
(......)
그럴 때마다
밤강에 갔지
손이 곱도록 은별을 주워 모았지만
가난도 재능인 듯
계산 안 되는 생은 바닥을 치고
가난이 가난히 늙어가더러
-「가난」 부분
누구나 경험하듯이 혼자만의 시간 속 자신을 성찰하고 뒤돌아보고 싶을 때 깡소주 한잔 마시고 싶어 한다. 화자는 가까운 편의점에서 술을 꼬셨다. 술을 꼬셨으니 당연히 술값은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정확히 찍힌 내 가난에/바코드가 찍찍 울어주더라”면서 바코드가 청각적 심상으로 ‘가난’을 확인시켜 준다. 그러면서 ‘울어주더라’, ‘마주하더라’, ‘늙어 가더라’면서 다소 명확하지 않고 불확실한 ‘~ 더라’의 종결어미로 각 연을 끝맺고 있다. 이것은 ‘밤강’에서 ‘은별’을 주웠지만, “가난도 재능인 듯/계산 안 되는 생은 바닥을 치고/가난이 가난히 늙어가더라”고 하면서 ‘가난’이 ‘재능’이라는 다소 내포의 거리가 먼 낯선 언어의 결합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같은 화자의 비유는 독자에게 지각의 변화를 주고 있다. 그러면서‘가난이 가난히’의 시적 번뜩임의 표현으로 독백하듯 읊조리고 있다. 시적, 물질적 가난의 다의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구성과 표현에서 시인의 세심한 시의 세계를 읽을 수 있다.
문득, 기생하는 자의 불안을 본 듯
한 번도 햇빛을 못 본 푸석한 노래
늦은 악보를 기어이
세상 밖으로 밀어내 본다
곧 사라질 숙주의 서늘한 온기를.
-「늦은 자화상」 부분
독자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시로 드러낸 이유는 뭘까? 아마도 시의 근원에 바로 ‘자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자아의 심연을 노래하기 위해 시적 표현을 찾아 헤매기도 한다. 시적 화자가 보여주는 ‘늦은 자화상’의 모습 속엔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그것은 ‘지푸라기’, ‘마른 먼지’, ‘하루살이’ 등의 시어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회의 통념과 상식으로부터 가볍고 격리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5연에서 알 수 있듯이‘늦은 자화상’을 푸석한 노래의 ‘늦은 악보’의 은유로 치환해서 그 악보를 “세상 밖으로 밀어내 본다.” 한다. 어쩜 화자(시인)는 자신의 감정과 정서에 중심을 두는 단순한 개인의 메시지일 수도 있지만, 또한, 그 너머의 ‘자화상’을 함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뭇사람과 사회적인 존재까지도.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몸으로 쓴 시가 신뢰받을 수 있다.
묵은 골목이 향기를 돌리는
우주의 화답은
초록에 닿아 명랑하다
수런대며 초록이 온다
오는 속내야 알 수 없지만
가고
오는
틈새에서 현기증 앓는
-「초록이 온다」 부분
“수런대며 초록이 온다”고 했다. 화자는 이처럼 약동하는 계절을 청각과 시각적 공감각으로 형상화하면서“묵은 골목이 향기를 돌리는/우주의 화답은/초록에 닿아 명랑하다” 한다. 당연히 좁다란 골목까지 초록에 물들어 향기를 내 뿜으니, 우주마저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읊조리는 듯한 발견의 시학에서 화자의 깊은 사유를 느낀다. 그러함에도 오가는 틈새에서 현기증을 앓는다. 그것은 계절과는 상관없이 전전반측, 푸른 생각에 잠겨 그리운 상사(相思)의 긴 밤을 느끼면서 ‘싱거워진 애인’의 등에 기대 지난 낯빛을 더듬고 있다.
사람을 사양할 줄 몰라서
가끔 뒤통수가 깨지기도 하지
오죽했으면
흰자위 보이도록 눈 치켜뜨고
사는 내내 벽이 되길 원했을까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서
원망이 흐르는 자리에서
벽을 친 마음에도
괜찮을 것 같은 내일이 대책 없이
설레
진저리 나도록 다시
부딪쳐 보자고
저 새벽
저 첫눈을 밟으러 간다
-「첫눈」전문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느끼는 바이지만, 험악하고 이기적인 사회일수록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배신, 사랑이 아닌 시기와 질투가 난무한 세상이 된다. 화자는 이러한 삶에서 “사람을 사양할 줄 몰라서/가끔 뒤통수가 깨지기도 하지” 한다. 하긴 양보 없이 치켜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커다란 장벽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원망’ 자리에 들어선 두터운‘벽’에서도 허물 수 있다는 희망의 내일을 기약하면서 “저 새벽/저 첫눈을 밟으러 간다.” 새벽녘 숫눈에 부딪혀 보고 싶다는 것은 첫눈이 덮은 온 누리에는 벽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 경험하기 위해 밟으러 간다. 시인은 너와 나, 이것과 저것 사이에 쌓인 마음의 벽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내일을 하얗게 갈망하고 있다. 첫눈 같은 시인의 마음결이 흰 눈처럼 고운데 차마 어찌 벽인들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시에는 수없이 많은 기법들이 있다. 짧은 글로 시인의 시적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압축적 기교가 필요하다. 시인은 효과적인 기법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던져서 독자를 자신의 시 속으로 끌어들여 실컷 의미를 펼치고 싶어 한다. 그렇기 위해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행태들을 탈피해서 새로운 의미를 꾀하려고 한다. 정은채 시인의 자기 성찰적 시편들에서 이러한 시적 발상을 보았고 더불어 다의적 해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 서정성과 미적 감각이 뛰어난 시인의 창조적 번뜩임의 시 세계를 기대한다.
---------------------------------------------------------------------------------------
'나의 시집 해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임동석 시조집 『별 하나 걸어놓고』 (1) | 2024.06.29 |
---|---|
박수호 시집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 (25) | 2024.06.21 |
구정혜 시인 유고시집 『하늘이 그러하였을까』 (2) | 2024.04.19 |
정현우 시집『내가 머무는 세상』, 비전북하우스, 2023. (1) | 2023.05.01 |
발견을 통한 의미 찾기와 동심을 일깨우는 마음의 눈 (2) | 2022.1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