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추(反芻)의 시학, 깊은 사유로 되새김하다.
(홍영수(시인 문학평론가)
어느 해, 땅끝 해남의 들녘을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비를 머금은 짙은 먹구름이 몰려왔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 유심히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 먹구름 틈새로 환한 한 줄기 은빛이 새어 나왔다. ‘한 줄기 은빛’과 같은 시적 근원을 체험하기 위해 시인의 눈엔 눈꺼풀이 없어야 한다. 시어를 찾고 발견하기 위해 세심한 관찰력과 열린 오감으로 사물과 대화하고 스며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수호 시인은 눈꺼풀이 없는 눈으로 생의 표층이 아닌 삶의 심층과 무의식을 뒤지고 난해하고 관습적인 시가 아니라 다른 언어와 다른 세계, 다른 삶을 얘기하는 시인이다.
필자는 부천시‘박수호 시인과 20여 년 지기이다. 상당 기간을 문학과 삶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얼마 전 박 시인께서 시집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의 해설을 직접 부탁해 왔다. 저의 부족하고 어설픈 능력과 과문함에도 불구하고 응했던 이유는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시간의 발자취를 남들보다 조금 알아서 부탁하지 않았을까 해서이다.
이렇듯 시숙(時熟)화 된 시인의 시편들은 인간관계론’의 연작시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논論’은 경전 등을 해설하여 는 ‘논論’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과 비유를 통한 시인의 시적 발화인 인간관계의‘논’이다. 시를 보자. “헛된 말들이 비듬처럼 떨어져 있다”(「인간관계론 40」)에서 지저분해서 거부감 있는 ‘헛된 말’과‘비듬’의 등치를 통해 ‘말의 삼가’를 비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잠시 눈을 돌리니 비듬과는 상반된 이미지의 ‘연둣빛’이다. 그 잎에 화자는 미안함을 느낀다. 아니 그 안에 젖어 들어 봄날 같은 순수한 새싹 같은 인간관계를 희망하고 있다.
(「인간관계론 41」)에서‘햇빛과 흐림’, ‘만남과 헤어짐’, ‘얻음과 잃음’의 등, 이분법적인 가름의 사유를 초월하면서 ‘이만하면 됐다’라고 말하는데 바로 눈앞에 시안(詩眼)이라 할 수 있는‘쉬! 조용’이라는 간판(강조성을 띤 짙은 글자)이 서 있다고 한다. ‘생주이멸’과 ‘이해득실’의 이러한 말조차도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세상을 깊게 관조하는 화자의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오늘 이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라고 한다
-「인간관계론 42」 부분
우리도 흐르지 않을 것 같지만
이 순간에도 흐르고 있고
-「인간관계론 44」 부분
위의 시는‘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한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萬物流轉’과 불교의‘제행무상諸行無常’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의 ‘바람’은 어제의 ‘바람’이 아니고, 흐르지 않을 것 같은 인간도 여전히 순간순간 흐르고 변화한다는 것을, 자연의 대표적 변화의 상징물인‘바람’과 ‘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비유하고 있다. 더불어 화자의 깊은 사념을 확대해 보면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차이와 반복’이라는 철학적 명제를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다.
한겨울 얼어붙은 땅에서도 보이고, 들리지 않지만, 작은 움직임들을 느낄 수 있다. 겨울잠 자는 개구리나 봄을 맞이하기 위한 초목들의 움직임 등처럼 “허리 굽히고 다가가 바라보면 꼬무락거리는 무언가 있다.”(「인간관계론 43」). 화자는 미세한 오감으로 감각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없으면 보아도 볼 수 없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視而不見 聽而不聞)’에서 보듯이 시적 감성과 통찰력 없이는 볼 수 없다. 이렇게 자신을 낮춰야만 보이는 것들을 말하면서 화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미세한 차이의 발견인 앵프라맹스(Inframince)와 조지훈의 시 「승무」에 묘사되는 ‘얇은 사(紗)’두께의 아슬아슬한 간격을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낮춤의 미학’의 또 다른 이름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앞을 향하여 걷기도 바쁘겠지만
걸음 멈추어 서서 뒤돌아보는
눈길을 따라가 보면
-「인간관계론 47」 부분
누군가 그립거나 생각날 때, 혹은 혼자만의 상념과 집착에 빠질 때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낀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혼자 내던져진 존재의 피투(披投) 적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냥 내 던져진 존재의 외로움, 그 외로움을 읊조린 시인 오스텅 블루는 “그 사막에서 그는/너무도 외로워/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사막」)에서처럼 화자는 앞모습이 아닌 뒤돌아보는 눈길에서 오히려 솔직함을 발견하고 있다. 인간관계 속 흔적의 발견이랄까?
또한, 시인의 시는 불온한 사회질서에서 오는 처절한 삶을 다소 거친 욕설의 시로 형상화해 진실을 얘기한다. 그리고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사회적 삶의 위기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회적 현상을 의식의 위기로 승화시켜 정화해 준다.
잡년, 은~ 잡년
하고 뱉어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속이 편안해지고
복잡했던 마음이 가지런해지고
아팠던 골치가 개운해지기도 했다
-「잡년」 부분
화자는‘잡념’과‘잡년’의 두 이질적인 개념들을 결합하여 조화로운 부조화의 형이상학파 시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잡년이라고 쓰려는 계획을/갖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이렇게 시상 전개를 위한 밑자리를 깔아놓고 “잡년, 은~ 잡년/하고 뱉어내는 버릇이 생겼다.” 하면서 속이 편안하다고 한다. 속이 편안하니 마음도 가라앉혀지고 개운해질 것이다. 이와 같은 화자의 욕설 아닌 욕설의 시는 일반적인 시에서처럼 정련된 언술을 보여주지 않고, 감정의 파편들을 욕설로 쏟아내는데, 그것은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겪고 있는 불편한 진실들을 초월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오히려 이런 아이러니는 페이소스의 어조를 띠기도 한다. 같은 맥락의 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언뜻 보면 시의 내용과 다소 거리감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읽힌다. 이는 선종의 가르침인 문자를 떠나서 그 어떤 틀이나 형식에 집착하지 말고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시인의 시적 품격을 그대로 보여준 시라 할 수 있다.
한 사내가 담벼락에 대고
오줌을 싼다
고개를 처박고 중얼거린다
씨펄 씨펄
니미 씨펄
(......)
씨 펄 네 에 미 씨 이 벌
- 「불립문자不立文字」 부분
몇 잔 술에 취한 사내가 담벼락에 기대어 고개를 처박고 오줌을 싼다. 그러면서 “씨펄 씨펄/니미 씨펄”하며 단순 경쾌한 운율의 2음절 반복법과 단어의 경음화를 통해 한층 욕설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그러면서 “니 기…… 씨―이”라고 하며 말줄임표로 욕설의 농도를 점점 느리고 엷은 어조로 취해서 흔들리는 취객의 모습을 이미지화해 상기시킨다. 어쩜, 화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 행 “씨 펄 네 에 미 씨 이 벌”에서 어디로 끌려가듯, 무언가를 흘린 듯이 각각의 글자를 띄어 쓰면서 긴 여운을 주고 있다. 마치 각각의 글자가 메아리 되어 들려오는 듯이. 이것은 욕설을 통해 불온한 사회에 대해 큰 울림을 주기 위한 시적 장치이고 발상이다. 이처럼 ‘잡년’이나 ‘니미 씨펄’등의 어투는 세상에 내 던져진 화자의 소외감의 심도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세상을 향한 강도 높은 질정으로 보인다.
또한 화자는 T. S 엘리엇의 시 ‘4월은 잔인한 달’을 연상하듯 「다시, 4월」의 시를 통한 제주의 아픈 역사 속 읊조림에서 근세의 4. 19와 4. 16을 떠올리게 하고 있다. 「얼룩」에서 보듯 얼룩진 한 시대를 겪고 건너는 동안 묻은 삶의 얼룩들을 생각하며 한 시대의 모퉁이를 돌아가는 화자의 시선은 늘 황폐된 사회 속 정신적 각성을 깨닫게 하고 있다.
이러한 시의 배경에는 불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올곧고 투사적인 기질의 소유자임을 오랫동안 겪어 본 필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러하기에 다소 불안한 사회현상과 격한 현실에 대한 저항 의식의 방편으로 다소 거친 독설과 욕설을 뱉고 있다. 이것은 참을 수 없는 감정과 욕구, 사회에 대한 화와 분노를 욕설로 대리배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품격은 시인의 깊은 폐부 속에 근원적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시인은 고향 해남의 기층적인 구어와 언어를 통해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방 특유의 살아있는 토속어의 사용은 시인의 고향에 대한 뿌리 깊은 에너지의 발현이다. 사라진 유년의 시간 속으로 걸어간 화자는 망각 속 기억의 편린들을 주워 모아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어머니는 얼마 전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닿을 수 없고
만져지지 않고
그리하여 불리지도 않을
막연한 아릿함이 되었다
둥글다는 것은 슬프다
- 「오도카니」 부분
시제에서 보듯 일몰의 시각에 오도카니 헐거운 생각에 잠겨있다. 하고픈 말을 해도 뜻이 되지 못하고, 닿을 듯한 풍경은 밖에 있는데, 그 풍경의 흔적은 내 안에 있다고 한다. 한때는 “늙은 어머니가/홀로 계신다”(「고향」)에서는 살아계셨는데 이제는“어머니는 얼마 전/왔던 곳으로 돌아갔다”에서 알 수 있듯이 화자는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혼자서 오도카니 있다. “이제는 닿을 수 없고/만져지지 않고” 얼마나 아릿하고 맘 아픈 그리움인가. 그러면서 “둥글다는 것은 슬프다”며 툭 던져놓고 있다. ‘둥긂’은 어머니의 은유이다. 어머니는 화려함이 아닌 소박함,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의 아름다움과 너그러움 속 순수한 성정 등이 어리숭한 둥근 맛의 달항아리를 닮았다. 이처럼 화자의 안에 흔적으로 남은 어머니의 둥근 삶은 슬픔이라고 화자는 얘기하면서 어머니가 지은 가마솥 숭늉 맛 같은 은은한 시상에서 존재의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화자가‘둥글다’는 도형적 이미지를 ‘슬프다’는 감성적 심상으로 바꾸어 놓은 그 감각의 치환에서 독자는 누룽지의 구수한 맛을 보고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표면적으로는 열린 기회와 복된 사회의 환상의 꿈을 각종 매스컴을 통해 비추고 있지만, 그 이면의 실상은 결핍과 고통의 부정적 요소들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누구에게든 고향은 온화함과 포근함을 느끼는 삶의 원형 공간으로 존재한다. 작금의 탐욕과 이해득실에 매몰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삶의 현실이 힘들고 지칠 때 시적 상상력은 흰 구름 속에 흐르는 유년의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머니 품처럼 따스함과 위무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화자의 여러 시편에서 이러한 시상을 볼 수 있다. “내 그릇의 크기는/종재기만한 것 같아”(「화담」)에서 친구의 순수함과 겸손함에서 화자는 천하의 황진이도 어쩌지 못했던 동명이인의 화담 서경덕의 품격을 비유하고 “어머니/응/인자 돌아가셔도 좋것소/아야 먼 뜬금없는 소리냐”「성한이 형」에서는 땅끝마을 해남의 탯말에서 고향으로 가는 토속적 언어들 속에 해남지방 고유의 정취와 정겨움이 묻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푸른곰팡이가 자라는 방에서/발톱을 깎던”「우리 집」에서는 시골 작은방에 군불을 지피고 거기에 누룩을 띄우는 풍경을 떠올리고, 또한, ‘박수호시창작교실’문우들인‘내영이·청계·구철이·미정·영수·부식이·명옥이’ 등등과 고향의 친구들인 ‘화담·창용이·정록이·영자’(「꽃잎은 바람에 날리고 나는」) 등등의 이름을 나열하면서 현재와 과거의 병존 속 화자와의 인간관계를 얘기하고 있다. 또한,‘말뫼(마늘뫼), ‘샘잔등과 개보’, ‘너멧동네’, ‘지발등과 우터구’, ‘뒷방죽’(「말뫼봉 아래 안동에서는」) 등등에서 동네 지명과 이름이 고향의 이미져리와 결부되면서 시골 풍경의 정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처럼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자유로운 영혼, 빛 속에서 어둠의 그늘을 찾는 박시인의 시집 『꽃잎은 바람에 날리고』는 자신의 주변 일상사에 대한 솔직한 고백과 삶의 입각점의 이곳저곳을 깊은 사유로 되새김하는 반추의 언어가 중심을 이룬다. 그리고 시인의 체험적 삶의 얼룩이 묻어 있는 시공간에 대해 물끄러미 바라보는 관조가 주조음을 이루고 있다. 그렇기에 시 속에는 일상적인 삶의 천연성이 묻어 있다.
예향인 땅끝 해남에서 태어나 교사로서 그리고 중견 시종(詩宗)으로서 선생님의 시적인 삶은 결코 탈속적, 추월적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순박 단아한 시의 숨결에서 통증과 사유의 고열을 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인과 동향인로서, 동인로서 존경을 표하며 아울러 필자의 부끄러운 졸문에 대방의 질정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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