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특별한 활동, 자기만의 리듬을 갖고 살아간다. 그 활동이나 리듬이라는 게 취미활동, 또는 추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등산, 낚시, 여행, 독서 등 수많은 분야가 있다.
이렇듯 정해진 테두리, 즉 회사나, 집 등의 고정된 카테고리를 벗어나 자기만의 휴식과 에너지 충전, 더욱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고 노력해야 할 이유가 바로 삶의 리듬을 갖는 게 아닐까.
삶의 리듬을 위해서는 틀에 박힌 일상을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타성에 젖은 네모 상자를 깨뜨려야 한다. 이러한 것이야말로 매일매일 억눌리고 틀에 박힌 삶에서 탈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나 음악처럼 운율이 있는 리듬감을 찾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기 위해서는 나를 감싸고 있는 고정된 그물을 찢고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동물적인 본능을 되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일상을 탈출해야 한다. 그래야만 푸르디푸른 생각들을 잉태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 결코 삶에는 자기만의 리듬이 필요하다. 너무 느리거나 너무 빨라도 안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리듬감은 템포와 관련이 있다. 너무 느리면 나태해지고 권태롭고, 너무 빠르면 위태롭고 현기증이 난다.
바다는 파도를 일으키고
숲속엔 새들이 지저귀고
봄은 꽃잎을 휘날리고
겨울은 눈송이를 내려보내고
하늘엔 달빛 별빛이 찬란하고
땅에는 눈빛 낯빛이 빛나고
아침의 햇귀에 해울은 영롱하고
저물녘 까치놀은 수평선에 반짝이고.
이와 같은 글을 쓰며 생각하게 된 것은 이 모든 것들은 자신만의 리듬을 찾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의 속도감에 젖어 살다 보니 방향성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이럴 땐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 자신만의 삶의 길을 걸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속도감에 지쳐 리듬을 탈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럴수록 우린 그 속도감에 브레이크를 밟아 늦춰야만 한다. 그래야 리듬을 갖게 되고 리듬 안에서의 삶은 그 리듬에 맞춰 흥얼거리고 또한 춤도 출 수 있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은 순진무구 존재로 인식하고 있지만, 변화가 없는 고정된 삶에서 오는 우울과 고독감에 잠길 때는 세상에 소외된 존재로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프레임에 갇혀 개인은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틀에 박힌 일상의 거죽을 벗고 찢어야 한다. 그리고 평상시의 패턴을 벗어나 새로운 삶의 리듬감(rhythemical)을 찾아야 한다. 시에서도 운율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시적인 우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보다 더 효과적인 운(韻 rhyme)과 율(律 meter), 즉 삶에 있어서 고저, 장단, 강약 등의 리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에서 리듬은 변화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 리듬은 외형률과 내재율이 있듯이 우리의 삶 또한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운율과 보이지 않는 내재율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삶 속의 조화와 변화, 삶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 이같이 리듬은 우리 삶에서 반드시 가져야 할 생활의 한 패턴일 뿐만 아니라 추구해야 할 지향점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은 너무나 익숙함에 젖어있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편안함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오랜 부부생활에 익숙해지면 자칫 매너리즘(mannerism)의 단계에 빠지거나, 때론 삶에 흥미를 잃게 되고 더 나아가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듯이 말이다.
이러한 것은 익숙함에서 오는 부정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럴수록 정지되어 변화 없는 익숙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활력 없는 생명은 죽은 삶이다. 이러한 삶에 생명을 불어 넣어 주는 활력소가 곧 삶의 리듬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사람에게 버려야 할 두 마리의 개가 있다고 한다. 편견(偏見)과 선입견(先入見)이다. 이러한 두 마리의 견(犬)으로 치장한 타성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유는 두 마리 견(偏見, 先入見)의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기 때문이다. 이렇게 늪이나 웅덩이에 빠져드는 순간 타성에 젖어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낯선 질문과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방향에 도전해 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상을 벗어나 여행한다거나 등산, 영화감상 등등에 뇌를 자극해 보는 것이다. 그러하면 타성에 젖은 생각이나 습관적인 일상에 새로운 리듬감이 생길 것이다. 그 리듬감은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멍때린 생각에 뺨을 때려 보는 것이다. 매일 먹는 밥에서 벗어나 외식을 하며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다.
창조와 상상력 등을 위해 낯설고 비틀어버린 시각으로 바라보고 접근하자. 그러면 새로운 삶의 리듬이 생기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시에서의 리듬이 겉으로는 잘 드러나 보이지 않지만, 의미를 통해서 내적인 리듬을 교묘하게 하여 독자에게 리듬감을 각인시키듯 우리의 삶에서도 리듬감을 가지고 나 자신과 타인을 위해서라도 리드미컬한 삶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한 삶이 바로 시적인 삶일 것이다.
---------------------------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
무료 사이트에서 가져 온 이미지
https://www.cosmiannews.com/news/149543
'나의 인문학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해 정의된다. (1) | 2024.07.29 |
---|---|
풍류(風流)와 도학(道學), 호남가단과 영남가단 (0) | 2024.07.16 |
세월을 아껴 쓰자 (20) | 2024.07.01 |
유좌지기(宥坐之器)와 계영배(戒盈杯), 잔에 인생을 담다. (1) | 2024.06.17 |
지하철에서 만난 도미에의 <삼등열차> (1) | 2024.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