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를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낯선 시선들, 그것은 일상의 마주침이다. 십수 년간,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느낀 단어가 바로 ‘낯선 시선’이다. 그 당시 지하철 풍경은 주로 집에서 가지고 나온 조간, 석간신문이나 가판대의 신문을 사서 보았다. 그리고 독서하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었고, 지금처럼 출퇴근 시간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졸리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었다.
지금의 지하철 또한 비슷한 광경이지만, 다른 하나는 신문이나 책 대신 남녀노소 불문하고 시선이 머무는 곳이 있다. 바로 핸드폰이다. 물론, 신문이나 책 대신에 수많은 국내외의 정보를 단 몇 초에 접할 수 있고. 또한 버튼 몇 번 누르면 세상 모든 정보의 바다를 항해할 수 있으니 말 그대로 손안에서 모든 정보를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만능 기계들이 움직이는 곳이 바로 지하철이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는 많은 승객들로 인해 몸을 움직일 수도 없을 정도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손에는 여전히, 아니 당연히 핸드폰이 쥐어져 있다. 그 화면은 연령층에 따라 다르지만, 각자의 시선은 그 자그마한 마법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떤 이는 멍때린 듯 차창 밖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귀를 보호하려는 듯 헤드폰을 쓰고, 또 다른 이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다. 이러한 풍경을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에 잡힌 광경은, 모든 시선들이 타인과 마주치는 순간 도망치듯 외면하면서 시선과 시선의 경계에 두꺼운 벽을 쌓고 표정 또한 무표정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적인 삶의 피로감과 고단함은 시선마저 강탈해 가는 것일까?
하루하루 살아가는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고, 때론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번민과 고뇌 속, 지친 피로감의 누적으로 우린 타인의 삶에 따스한 관심과 애정과 시선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무관심하기보다는 오히려 관심 둘 여유가 없는지도 모른다. 이 모두가 살 만큼 산다는 오늘날의 모습이고 현실이다. 이러한 삶의 풍경들 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작품이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이다.
<삼등열차> (Le Troisième Classe)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풍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1808-1879)의 작품이다. 이 회화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계층적 구조와 일상을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도미에가 살던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육체적 노동과 산업의 노동자들인 노동자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커다란 고통을 견뎌야 했다. <삼등열차>는 작품명에서 알 수 있듯이 환경이 좋은 일등과 이등석의 객실에 대비되는 객실이다. 그래서 삼등석 사람들의 표정은 왠지 무표정하고 찌든 모습들이다.
<삼등열차>의 작품을 보면, 객차엔 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다. 시골 노파의 깊게 골패인 얼굴과 조금 굳은 듯이 곧추선 몸에서 지난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바로 옆에는 꼬마 사내아이가 고개를 떨구고서 할머니에게 슬며시 기대고 있는 모습이다. 그 옆의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아낙네는 풍만한 젖가슴으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으며 가만히 보면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승객들의 시선은 서로 마주치지 않고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현대는 다양한 구성체의 사회이다. 그들과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고 또한 보다 발전적이고 성취감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그 와중에 서로 간의 시기와 질투가 동반되기도 한다. 그리고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욕구는 끝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다 이룰 수는 없다. 비록 원하는 만큼의 욕구를 성취한다고 해도 또 다른 욕구와 욕망의 얽매임 속에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현실성의 부정성을 문학과 예술은 비판적 시각으로 작품화한다. 그것은 인간이 바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 있는 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전철 내의 풍경을 보고 겪으면서 도미에의 작품 <삼등열차>를 소환해 보는 이유이다.
지금의 현실이 물질적 풍요가 넘치는 삶일지 모르지만, 한 편에서는 빈곤 속 힘든 생활고에 시달린 경우도 많은 게 현실이다. 또한, 물질적 풍요의 반대편엔 누구를 막론하고 정신적 메마름과 피폐함을 겪고 있다. 그러한 모습들이 지금의 전철 풍경이고 그래서 오버랩 된 풍경이 <삼등열차>였고, 또 하나는 목포에서 겪었던 모습이다.
목포에서 학교 다닐 때 기차를 이용해 등, 하교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당시 그들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떠 오르는 풍경이 있다.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 그곳으로 달리는 새벽 기차에는 어김없이 보따리와 고무대야 등에 생선과 곡물을 싸고 담아 열차에 오른 농어민들이 많았다. 그들의 모습은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열차>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초점 잃은 시선과 말 없음의 정적을 싣고 달리는 기차의 기적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힘든 노동과 객지에 나가서 공부한 자식들을 위해 불철주야(不撤晝夜) 쉼 없이 고된 일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멍때린 표정으로 달팽이관은 닫고 먹고사는 것과 자식 뒷바라지만이 오직 심연에 가라앉아 있을 뿐,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 듯한, 그러함에도 뭔가를 갈망하는 무표정의 얼굴들이었다.
현시점에서, 시대와 국가를 초월한 프롤레타리아의 무산자계급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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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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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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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도미에, <삼등열차> (Le Troisième Classe)
https://www.cosmiannews.com/news/287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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