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 어떤 이름도, 역할도 없이 태어난다. 또한 그 어떤 창조주가 있어서 미리 정해준 법칙과 규범도 없고 사상이나 이념을 갖지 않고 존재한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규칙이나 규정, 의무감도 없기에 어떤 역할에 대한 부담 없다. 그리고 무엇이 될지에 대한 걱정 없이 자유로운 의미의 실존 속으로 내 던져진 피투(被投) 적 존재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그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갖고 태어나지 않기에 본질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백지상태로 주어진 실존의 우리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본질을 만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유로우며 그 자유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고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적 본질을 찾고 만들어 가는 방법의 하나가 배움의 과정이 아닌가 싶다. 물론, 학교라는 정규 과정과 그 테두리 안에서의 공부뿐만 아니라 특히, 나이 든 시니어들의 각종 활동을 통한 배움의 과정 또한 진정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성인, 특히 퇴직과 더불어 노년의 삶에 접어드는 시니어들이 자기 계발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느냐도 바로 실존주의적 사고와 같이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린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과 배움을 욕망하고, 성장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이러한 과정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만큼 시니어들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최근에 65세 이상이 천만 명을 넘어섰다는 뉴스를 접했다. 가히 시니어 시대라 할 수 있고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필자도 주변의 많은 시니어들을 만나고 또한, 그들의 다양한 활동상을 직간접적으로 보고 체험하기도 한다.
나이 듦에서 오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 ‘살아있는 죽음(living death)’에 얽매이지 않고 주어진 여백에 자신이 지향하는 진솔한 삶을 그리는 그들의 삶, 자신의 자유와 독립성을 가지고, 자신을 가꾸고 일구면서 사회적인 작은 부분에 이바지하는 그들은 문학과 각종 예술 분야 등에서 활동하는 시니어들이다. 최근에 만난 시니어들의 글쓰기 그룹인 ‘문예 창작’, ‘영상팀’‘시 낭송 동아리’ 등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물질적인 욕심을 떠나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픈 것들을 찾아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한다는 점에서 삶에 더욱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을 성장시키고 행복을 추구하며 진정한 실존주의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더불어 개인적인 책임과 자유,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분들이야말로 사르트르가 얘기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를 몸소 실천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신의 존재 자체를 스스로 창조하고 실천해 나간다는 점에서 휴머니즘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고 선택한 삶에 따라 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과 책임감을 생각하고 가져야 함은 물론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존재와 무』에서 대자적 존재와 즉자적 존재를 얘기한다. 스스로 의식하면서 자족하지 않고 자신의 밖에서 참나를 찾고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존재인 대자적 존재자가 되느냐, 아님, 의식 없는 인간이 되어 스스로 의식이 없어지는, 장롱 속에 걸려있는 옷들과 같은 사물의 존재인 즉자적 존재가 되느냐의 선택은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대자적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즉자적 존재도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성찰하고 자신의 결핍과 근원적 물음에 꼬리표를 매달고 스스로 실존적인 의미를 찾아 나서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보고, 만날 수 있는 노년기에 접어든 시니어들을 보면, 자원봉사나 여행, 시니어 모델,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 등에서 운영하는 배움터 등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을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위에서 얘기했던 각종 분야에서 몸소 체험하고 배워가며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실존주의적 시니어들이라 할 수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다고 주장하며 이는 우리가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이 자유는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고 표현했다. ” 내 스스로 나를 창조하지 않았는데, 자유가 주어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자유를 사용해야 할까? 그 사용법을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것일까?
비록 나이 듦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지금의 삶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넘치지 못해 작고 부족하고 힘이 없을지라도 우아한 가난을 지향해야 한다. 생각하고 실천하기 어렵고 힘들겠지만, 그것은, 내 스스로 나를 창조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늘그막의 황혼 무렵에도 씨를 뿌릴 줄 아는 사람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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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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