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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남녘의 고향에 갔었다. 집 앞에는 작은 개울물이 흐르고 뒤편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다음 날, 집 뒤편의 대나무 숲을 잠시 둘러보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었다. 대나무 숲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논둑에 죽순이 두 개 솟아나 있었다. 대숲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솟아난 죽순, 낯선 풍경에 한참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 끝에 대나무의 번식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바로 그때 떠오른 것이 뿌리줄기 식물인 ‘리좀(Rhizome)’의 개념이었다.
현대 사회는 문화와 예술,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융, 복합된 시대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동적 가치체계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사고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다원화를 통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게 특징이다. 리좀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끊임없이 분기하면서 생성되는 과정을 거친다. ‘리좀’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 핵심적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과거의 정보전달 방식이 수직적이고 위계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지금은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틱톡, 소셜네트워크(Social Network Service) 등을 이용하여 시간과 장소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대상에 대해 구별하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고 아이디어의 원천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유동적인 사회의 급작스러운 변화는 포스트 구조주(Post-structuralism)의의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탈 중심’, ‘상호 텍스트성’, ‘다원화’ 등의 개념을 도입해서 기존의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철학 중심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는 수평적 구조의 개념인 리좀으로의 변화이다. 이것은 서양의 로고스 중심의 수목적 사유 방식과 구별된다.
또한, 수목적 사고는 절대적인 중심 뿌리를 바탕삼는다. 그래서 이원론적 사고를 통해 대상을 두 개의 축으로 나눠 고정된 본질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리좀의 사유는 땅속줄기를 의미하는 생물학적 용어인 리좀에 대해 시작점도 없고 끝점도 없으며 항상 중간을 뜻하는 수평적 구조라고 누군가 정의 한 바 있듯이 이러한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끊임없이 창출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19세기가 '이것이냐, 저것이냐(or)' 의 세기였다면, 20세기는 '와(and)'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기서 ‘와(and)’는 두 가지 이상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사고가 아니라 두 가지 이질적 속성을 비록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로 끌어안는 사고방식을 얘기한다. 이러한 사고는 어느 하나를 포기하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다름’과 ‘차이’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다름을 꾸준히 창조하는 ‘리좀’적 사유라 할 수 있다.
수목적 사유는 서양의 고질적인 병이다. 어떠한 계기와 원인을 찾아 그것을 원리 삼아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사유이고 여기에 반해 수평적 사고는 어떤 관계에 따라 모든 것들이 달라진다. 무엇과 무엇이 만나 관계하느냐에 본질이 달라진다는 것, 생생과 상극이 달라진다. 관계한다는 점에서 불교적 사유와 유사하다. 우린 이러한 수평적 사유를 통해 기존의 중심주의와 위계적인 질서를 탈피해서 분기하고, 확장 시키고 해체해서 창조적인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할 때이다. 고구마나 감자, 토란, 대나무, 잔디 등의 수평적 연결인 뿌리줄기처럼…
리좀의 사유는 철학과 문학 각종 예술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개념과 방법론적 측면을 모색하고 또한 활용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리좀의 사유는 현대 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지금의 현실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중심과 주변의 개념이 무의미해지고 다양한 생각과 관점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 또한 강조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다양성의 존중이랄까? 이러한 탈중심주의인 리좀의 사유는 다양성에서 오는 변화를 존중하고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생성과 변화의 사유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까지 머리를 쓰는 단 하나의 방법으로서 논리적사고와 분석적 사고에서 볼 수 있는 수직적 사고를 해 왔다. 그러나 수평적 사고는 일정 방향을 향한 패턴을 벗어나 개별의 몇 가지 패턴으로 이동할 것을 요구한다. 두뇌의 기능은 항상 수직적 사고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는 만큼, 특히 수평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양자택일이 아닌 더 넓은 시야로 둘, 셋, 넷으로 이어지는 리좀의 시선으로 사유하면서 기존의 수목형 사고의 틀을 확 깨 부숴버릴 수 있어야 한다. 수직이 아닌 수평, 뿌리가 아닌 뿌리줄기로 분기해서 생성하는 마음 자세로 자신과 타인, 그리고 그물망 조직 같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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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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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1 고향 남녘의 보금자리. 사진/홍영수
뒤안의 대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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