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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나 플라톤, 그들의 작품인 <논어>나 <소크라테스의 변명> 같은 고전들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우리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값진 존재로 여기고 있다. 이처럼 인문학은 모든 학문 분야의 원천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근본적 역할을 해 왔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이나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등도 인문학자들로서 자연과학의 영역을 새롭게 열었다. 그 이유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이고 발상의 전환 속 사유의 전복을 했었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사회는 오직 경제적 가치와 효율성만 강조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시대이다. 그래서 인간다움의 가치가 실종되고 또한 윤리 의식도 실종되어 버렸다. 우리나라 대기업의 대졸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국문학, 철학 등 인문학 전공자들이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어느 매체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 이유는 인문계열보다 상경계열이나 이공계열 등의 분야를 더 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식들을 인문학과에 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그게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일까,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은 최근에 사회와 학계 전반에 걸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지금 사회의 구조상 과학과 기술, 공학 등의 분야에 따른 발달과 그에 관련된 직업의 빠른 증가 등으로 인해 인문학 전공자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경제적 가치나 수량으로만 헤아릴 수 없는 학문이 인문학이고 이러한 인문학은 인간 삶의 본질을 궁구하는 학문이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위기를 맞은 인문학의 본질적인 문제와 역할 등을 심사숙고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학문과의 교류와 소통, 그리고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인식의 재고일 것이다.
학문의 종갓집인 인문학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현실 앞에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보다는 제대로 된 실상을 먼저 파악하고 돌파구를 찾아서 인문학의 효용론적 관점과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것만이 종갓집의 체면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남이 해주는 게 아니라 인문학도들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AI시대이다. 사이버의 가상 세계 발달과 그에 따른 다양한 통신매체와의 소통 등으로 인해 불과 수십 년 전과는 전혀 다른 변화의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 또한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시대는 인문학의 위기이면서 한편으로는 어떤 학문 보다, 인문학의 필요성이 절실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인문학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이룩한 지식체계에 관심을 두고 인간 존엄성의 차원에서 사유의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빛나는 인문학 분야의 지혜와 세계 등을 통해 인간적인 삶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서양에서 인문학은 휴머니티(humanity)라고 한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되었는데, 인간다움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구글을 이끌었던 에릭 슈미트는 펜실베이니아 대학 졸업생들에게 “컴퓨터를 끄고,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잠시 아날로그로 살 것”이라고 얘기했던 기사를 보았다. 가상 세계인 컴퓨터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현실 속 아날로그적인 삶을 살아보라는 얘기일 것이다. 이처럼 세계적인 IT의 리더들은 역설적으로 독서를 통한 상상력과 통찰력 등,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보면, 인문학과 독서를 통해 세상을 분석하고 읽어내는 능력은 역시 인문학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련 분야 전공자들이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새로운 인문학 가치를 창출하고 다른 학문과의 융복합을 통한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또한,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교육을 통한 중요성을 알리고 소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과 문화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학문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인문학의 혁신과 사회적 인식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생전의 이어령 선생은 어느 모임의 기조연설에서“인문학이 지금부터 할 일은 남이 해줄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할 일이다. 인문학이 학문의 수원지(水源地)라지만 그 물이 오염된다면 아무도 마시려 하지 않을 것이다.” 했다. 인문학의 위기를 벗어나는 길은 수원지의 물을 맑게 함은 물론이고, 흘려보내야 할 물줄기 또한 깨끗하고 맑아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의 각종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마셔야 할 물이지만, 학문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오염된 물은 안 마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마셔야 할 원천수(源泉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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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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