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학제간의 경계를 넘어서 예술의 지평을 넓혀주는 융복합의 가치와 미래 그리고 통섭적 사유와 상상력을 주장하며 다양한 방면에서 적용, 실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질 들뢰즈의 리좀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것으로 사료된다.
리좀이란 어떤 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접속되어 유동성으로 모든 것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옛 건축물을 보면 주변의 환경과 생태적, 자연 친화적인 디자인으로 다양한 학문 영역의 경계를 무너뜨려 융복합적인 차원에서 가치를 두고 건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통섭적이고 융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은 몸에 지닌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감각은 다름 아닌, 眼耳鼻舌身(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에 바탕을 둔 감정과 감성 등, 총체적이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예술인류학>에서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서로 다른 영역을 횡단 할 수 있는 ‘유동적인 마음’에 있다”라고 한다. 창작을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들에게는 무의식에 잠재된 날것의 감각을 깨어나게 하는 공감각과 지성적 예술 활동이 바로 창조적인 예술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공감각이란 말은 그리스어에 뿌리는 둔 것인데 ‘융합’,‘결합’하는 뜻의 ‘syn’과 감각의 의미인 ‘aisthesis’의 합성어로 ‘감각의 융합’을 의미한다. 이렇게 공감각적인 사유의 확장과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새로운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본다거나, 냄새를 맡는 게 아니고 듣는 다거나, 등, 어떤 형상이 시청각적인 현상에서 색이나 맛을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공감각적 심상이다. 색소폰 소리에서 보라색 뱀이 천장을 기어 다닌 모습은 본다거나, 하모니카 연주에서 청록색을 보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기타 연주를 듣고 강물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는 등등이 바로 공감각 현상이다.
시인 랭보의 시를 보자. “검은 A, 흰 E, 붉은 I, 푸른 U, 파란 O 모음들이여/언젠가는 너희의 보이지 않는 탄생을 말하리라”.“바람 구두 신은 사내”로 불리는 그의 <모음들>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랭보 시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인 베를렌과의 동성애이고 성격 차이로 돌아서면서 베를렌이 권총으로 랭보를 쏘고 나서 결별한 사건이다. 이때 발간한 시집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다. 참고로 ‘모음들’이라는 시는 랭보 박물관에 걸려 있다고 한다.)
러시아 출신 스크랴빈의 프로메테우스: ‘불의 시’라는 교향곡에서는 ‘소리 없는 건반’을 이용하여 색깔이 공연장에 넘쳐흘렀다고 한다. 그리고 뜨거운 추상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러시아의 볼쇼이 극장에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보면서 눈앞에 색이 보이고 선이 마구 펼쳐지는 공감각을 경험했다고 한다. 色聽(색청), 색을 듣는 사람들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수많은 화가나 음악가 등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 또한, 창조적인 작품의 근본적 바탕이 공감각임을 알 수 있다. 세기말 빈이라는 도시는 지성사와 문화사의 절정이었다. 그 이유는 문학, 미술, 음악, 건축, 심리학의 주역들은 모두 서로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씨줄 날줄로 엮이고 얽혀 있어서이다. 결코, 그 어떤 분야든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판에 박힌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모험과 도전 없이 어찌 응전이 있으며 또 다른 차원의 감각 지평을 열 수 있겠는가. 통섭적, 융복합적인 사유와 통찰력으로 창의적인 예술혼을 키우자.
돼지고기 맛이 동그란 맛이 나고 소고기 맛은 네모 맛이 나야 한다. 맛에 모양이 있다는 것, 그것은 맛의 미각에서 도형적인 미각을 느끼는 감각이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색상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다름을 느끼고 눈으로 보는 것에서 눈으로 냄새를 맡는다. 메를리 퐁티는 ”통합적인 지각은 법칙과 같아야 한다“라고 했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시각, 촉각 등, 오감의 단순한 정보의 결합이 아닌 나의 모든 감각들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귀로 듣게 하고, 눈으로 보게 하는 것과 더불어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방법으로 지각을 한다.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이러한 감각을 가지고 다른 감각의 방과 창문을 드나들고, 열고 바라보아야 한다
나날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현시대에는 무엇보다 한 분야의 전문적 지식이 아닌 문학, 건축 등의 각 예술 분야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정보와 지식의 습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시인은 미생물학을, 화가는 농학을, 법학도는 화학을, 음악가는 건축학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분석을 통한 재통합과 통섭적인 지평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섭적이고 융복합적인 사유를 가져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고 상상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은 나보코프와 라이트 힐의 말을 빌려 “공감각은 사물을 한가지의 지각양식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높은 수준에서 경험과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 열쇠와 같다.”고 했다. 이렇듯 감정적인 동시에 지적이고, 다중감각적인 심상을 가지려면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서 여러 겹의 의식을 지녀야 한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홍영수 칼럼] 통섭적 사유와 융복합적 통찰력 - 코스미안뉴스
최근에는 학제간의 경계를 넘어서 예술의 지평을 넓혀주는 융복합의 가치와 미래 그리고 통섭적 사유와 상상력을 주장하며 다양한 방면에서 적용, 실행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질 들뢰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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