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점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전시회, 미루고 미루다 틈을 내어 다녀왔다. 많은 전시회를 다녀봤지만, ‘사유의 방’은 설치미술 같은 유물 전시공간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 좋았다.
입구에는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Time to lose yourself deep in wandering thought”라고 쓰여있다. 공간의 벽은 해남에서 가져온 황토로 공간을 채우고 있다. 황토 특유의 온아함과 포근함, 그리고 천장에는 별처럼 보이는 조명이 우주적 공간처럼 느껴졌다. 우선 ‘사유의 방’ 은 누가 들어와도 사유하게 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그 공간의 반가사유상은 뒷모습도 볼 수 있게 큼, 사방을 걸어 다니면서 어느 각도에서든 사진 촬영도 할 수 있는(후레쉬는 사용 금지) 공간을 껴안은 사유의 공간이다.
‘사유의 방’이기에 사람이 많으면 사유하기엔 좀 그렇다. 어느 전시관이든 관람자가 많으면 혼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에서 오는 예술적 감각과 영감을 떠올릴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사유의 방’은 평일 오전이 관람하기에 좋다. 때마침 두세 명밖에 없는, 혼자인 짧은 순간도 있었다. 그래서 온전히 나만을 위한 공간임을 보고 느낄 때의 넘치는 흥분과 희열이었다.
‘사유의 방’에 전시된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백제 시대에 반가사유상(국보 제78호))과 7세기경 신라 시대로 추정되는 반가사유상(국보 83호), 두 점이 말 한마디 없이 침묵의 자세를 하고 있다. 대부분의 전시회에는 작품에 관한 해설 등이 여기저기 있는데 여기는 없다. 오직 두 점의 반가사유상만 사유할 수 있어 좋다.
국보 83호의 얼굴은 풍만하고 둥근형이다. 오뚝한 콧날과 특히 입가에 띤 희미한 미소를 본다. 웃는 듯, 아니 웃는 듯한 모습은 그리스 조각 양식의 쿠로스(Kouros)와 코레(Kore)에 표현된 아르카익 미소(Archaic smile)에 비견할 바가 아니다. 감정 표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미소라고 할 때 국보 83호의 고졸한 미소가 바로 그러함을 알 수 있다.
한민족의 유구한 역사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수많은 외침을 받으면서 불굴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부로부터 도입된 문화를 우리의 독자적인 한민족 문화로 승화시키고 발전시켜 왔다.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백제의 석조 건축물, 신라의 금속공예, 고려의 청자와 조선의 회화와 백자 등에서 알 수 있다
신라의 화랑들도 미륵보살에 귀의했듯이 한국에서 미륵보살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 철학자 칼 야스퍼가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가진 마음의 영원한 평화라는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라면서 극도로 감탄한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지(廣隆寺)의 목조 반가사유상이 있는데 아마도 이 미륵상은 백제에서 건너가지 않았을까 한다. 그 이유는 이 목조상의 재료는 적송(赤松)인데 당시 일본에는 적송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반도 기원설이 유력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저들은 ‘일본의 풍토설’이니 ‘일본인의 理想美’라는 추상적이고 모호한 주장만 하고 있다. 하긴,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저들의 억지 주장과 설득력 떨어진 자료 등을 제시한 저급한 행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점이 섬나라의 특성일까?, 근성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가사유상’의 온화한 ‘미소’ 앞에서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미소 짓지 못하고 안색이 변하고 말 것이다. 난 저 미소 앞에 순간의 몸짓으로 달려가 입맞춤하고 싶었다. 그 얼마나 은밀하고 고귀한 입맞춤일까. 힘껏 껴안아 불상이 넘어진들 대수겠는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성이 찾아와 실패하고 말았지만.
정신 차리고 빙 둘러보았다. 저 두 분은 1400여 년을 지금까지 무엇을 저렇게도 사유하고 있을까. 한 손은 턱을 괴고 반가좌를 하고서. 보면 볼수록 나를 사유케 하는 알 수 없는 사유 너머의 존재. 오히려 사유하면서 행복 너머의 고통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생은 고해의 바다임을 알게 해 준, 사유하는 국보급 문화재(지금은 국보 몇 호라고 쓰지 않는다.) 저 상 앞에서 신라, 백제를 구분한 듯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것을 논하는 학자들의 시비나, 불상의 보관(普觀)이 어떻고, 형식과 어깨의 흐름이 어떻다고 논하는 자체가 오히려 무의미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 어떤 이유를 떠나 ‘사유(思惟)’라는 두 글자를 사유함이 ‘반가사유상’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다시 한번 둘러본다.. 왜 저리도 깊은 생각에 잠겼을까. 오른쪽 다리를 구부린 채 왼쪽 다리 허벅지에 올리고, 몸은 지그시 앞으로 숙였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조각상 보고 감탄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반가사유상의 고뇌하는 모습에 감탄과 경탄을 하지 못하겠는가. 다만, 심미안에 기댈 뿐이다.
오랫동안 머물렀다 ‘사유의 방’에서 나와 한적한 곳의 의자에 앉아서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반가사유상’의 저 자세와 표정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상념에 잠긴 반가사유상, 그가 사유하는 게 아니라 그대의 像이 나를 사유케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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