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19기 산업혁명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한 차별은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진행해 왔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를 발간해서 사회적인 여성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페미니즘 논쟁을 촉발했다. 남성 예술가들보다 여성에게는‘여류화가’,‘여류시인’ 등,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여 지칭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관습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여성은 사회적 지위 앞에 성차별적인 생물학적 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일까.
한 예를 들면,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일기로 쓴 책『나는 천재다』에서 천재 미술가 10명을 선정했다. 그러면서 천재 미술가가 존재하지 않은 이유를 “여성이 열등하고 예술적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백인 남성주의자들이 철저하게 미술사를 왜곡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교육과 사회의 제도적 폐해와 여성의 능력을 시기한 당대 남성들의 고의적, 의도적 무관심이 빚어낸 결과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도 화필을 놓지 않고 이젤 위에 꽃을 피운 여성 예술가들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1896~1948), 로댕의 제자이면서 모델이고 연인이었던 까유미 끌로델(1864~1943) 그리고 지금 만나보기로 한 멕시코 여성주의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1954)이다.
프리다는 멕시코 외곽의 작은 마을 코요칸의 푸른 집(지금은 프리다 칼로의 기념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여섯 살 때 오른쪽 다리에 소아마비를 앓고 절뚝거리게 되어 ‘나무다리 프리다’라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그녀는 2천 명이 다니고 있는 최고의 명문 국립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여학생은 35명에 불과해 인기와 함께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의사의 꿈을 갖게 된다. 그러나 하굣길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차와 충돌하는 순간 18세 소녀의 꿈도 날아가고 말았다.
조각보 맞추듯 해야 했던 찢긴 몸과 끔찍한 사고의 후유증에 시달리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는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누워만 있을 수 없다는 듯 살고 싶은 욕망과 절박함에서 목 놓아 통곡하기보다는 상처를 씹어 삼키면서 이젤 위에 화필을 휘갈기면서 자신을 달랬다. 그래서 그림은 그녀를 존재케 했을 것이다.
한 여름날 프리다 칼로 전시회(소마미술관)에 갔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이 <부서진 기둥>이었다. 저토록 황량한 벌판에 여성이라면 감춰야 할 젖가슴을 대담하게 내놓고 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온몸에 박힌 수십 개 못 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 클로즈업되었고 얼굴과 젖가슴에까지 박혀 있는 것을 보면 육체의 고통보다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표정에서 정신적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여섯 번이나 수술받았던 척추를 세우고 있는 기둥은 고대 아르테미 신전이나 덕수궁 석조전의 기둥에서 보듯 여성적인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받치고 있지만 많은 곳에 금이 가 있어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의 살아온 삶과 지금의 위치가 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것과 같이 자신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치유하는 길은 차라리 그 고통을 충분히 느낌으로써 치유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또 한 작품, 인면수신(人面獸身)의 <상처 입은 사슴>이다. 큰 나무들이 들어선 빽빽한 숲속을 뛰어가는 수컷 사슴 한 마리, 온몸엔 9개의 화살을 맞고 피를 흘리며 뛰어가고 있다. 누가 아니, 무슨 이유로 저리도 가녀린 소녀의 봄꽃 같은 몸에 화살을 쏘았을까. 자신의 아픈 상처와 고통을 사슴을 등장시켜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멀지 않는 곳에 보이는 바다와 음산한 분위기에 죽음을 몰고 올 듯 천둥 치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상처받고 아픔을 겪지만 많은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통해 더욱 굳건해지고 강해지기도 한다. 이 그림을 보면 프리다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실 초현실주의자들은 인면수신(人面獸身) 또는 인면조신(人面鳥身) 형태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우리의‘백제금동대향로’에서도 인면수신(人面獸身)과 인면조신(人面鳥身)의 형태를 볼 수 있다. <상처 입은 사슴>은 프리다가 직접 키우던 사슴(그리니소)을 모델로 자신의 아픈 상처를 작품으로 대신 표현했다. 9개의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이 사슴, 프리다 칼로는 이미 어쩔 수 없는 고통의 희생양이다. 숲속 끝에는 바다가 보이며 검은 먹구름과 천둥은 죽음을 몰고 오듯 숲속을 향하고 있다. 그토록 힘든 프리다 칼로의 새로운 삶의 새벽은 이렇듯 칠흑 같은 어두운 밤으로부터 새롭게 시작되었을 것이다.
미술을 감상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의미를 찾는 것은 어디까지 감상자의 몫이다. 각자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보고 듣는 이에게 감동을 주면 좋은 예술작품이 아닐까. 예술가는 욕망에 시달리면 시달릴수록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프리다 칼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욕망에 시달려보자. 행복을 느껴보기 위해.
부서진 기둥*/홍영수
아프다는 말은 하지 말자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도 침묵하자
황량한 벌판 너머
죽음의 그림자 다가오고
대못 박힌 젖무덤에서
젖이 나오리라는 것도
앙가슴 사이에 세운
부서진 기둥 척추 삼아
똑바로 서서 살아가는 것도
이 여자 앞에서는
입시울 닫자.
정면을 응시하며
흐르는 눈물 속엔
한 여자의
삶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
*Frida Kahlo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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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프리다 칼로의 '부시진 기둥'
https://www.cosmiannews.com/news/143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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