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의 시 평론 33

일천 개의 鏡/양성수

큰스님 선문답하듯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말하지 말라 산속에 물 있고 물속에 산 있느니 보이는 대로 보려 하지 말고 생각되는 대로 생각하려 하지 말라 보여지는 생각되어지는 것들은 얼룩진 거울 속에 비친 네 마음이려니 산에서 물을 물에서 산을 보라 산과 물은 태초부터 하나였음을 알게 되리니 디카시집 『자네 밥은 먹고 다니시는가』, 산과들, 2018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물론 성철 스님 때문에 그렇지만 이미 선불교의 화두로 백운선사나 경봉 스님이 즐겨 썼던 말이다. 물론 ‘청원 유신(靑原 惟信)’선사가 처음 했던 말이다. 참선에 몰입한 그는 30년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높..

페르소나/박선희

병원 1층 로비 띄엄띄엄 환자들 모여 앉았다 박수소리에 섞인 웃음소리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껑충 키 큰 남자 우스워 죽겠다는 듯 허리를 꺾었다 편다 노란 꽃 달린 머리띠를 하고 목에는 청진기를 걸고 뱅글뱅글 눈알이 그려진 안경을 쓰고 완강히 닫힌 문처럼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소리만 요란한 얼굴들 몇 차례 시키는 대로 따라 웃더니 움찔, 굳은 표정이 풀린다 억지로 웃었던 웃음인데 서서히 허물처럼 벗겨진 가면 웃음은 가면으로부터 얼굴을 꺼내는 일 웃음의 힘은 무섭다 치매는 앓는 아버지, 요양에 두고 급히 돌아 선 등으로 억지웃음을 시키며 웃음을 삼킨 웃음 치료사 오늘도 가면을 쓰고 산다. 시집 , 현대시학, 2016 --------------------------- 문학회 기행에서 하회마을에 갔을 때‘..

사랑이 예약된 당일 아침/유부식

아침 공기가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재즈의 선율이 내 온몸을 휘감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고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그려보고 저녁에 만나는 순간까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나와 그 순간이 약속된 이여! 나와 하나 되기로 선약된 이여! 사랑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는 죽어서도 잊지는 말자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시집 「카카오 스토리」, 산과들, 2014 ---------------------- 시라는 장르 자체가 다의성과 시인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제의 의미는 결혼하는 날을 의미한 것으로 읽히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읽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든 젊은 남녀 간의..

물거울/양정동

물거울/양정동 실바람이 간간히 스쳐가는 연못 위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나무 가지를 타고 참새가 연못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내 얼굴을 호수가 보고 있어 내 마음도 보려고 손 컵으로 물을 뜨니 찡그린 표정으로 조용히 두고 보라 한다. 마음은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 조용한 연못을 스치는 실바람 소리에서도 작곡가는 시의 리듬을 들을 수 있고, 파란 하늘에 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고 한 줄의 시를 띄울 수 있고,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세속적인 합창 교향곡의‘종’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복음을 생각하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바로 옆 소나무 가지를 오락가락하며 뛰어노는 참새 떼가 물속에 투영..

경계境界/김경식

수덕사修德寺 가는 길 난데없는 겨울 소나기라니, 일주문에 서서 비를 긋는다 산중엔 따로 울을 두르지 않느니 문안의 비와 문 밖의 비가 다르지 않아 바람은 빗물 따라 산을 내려가고 어둔 귀 하나 문설주에 기대어 저녁 법고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집『적막한 말』 ------------------------------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첫 번째 세워진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가람에 문은 문짝이 없다. 문은 공간 분할만하고 상징적일 뿐이다. 그리고 주변엔 울(담장)도 없다. 산중 사찰은 대부분 개방적이다. 불교는 오고 감에 자유자재 한다. 부처님을 여래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속세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한 마음으로 통하는 진리의 세계로 향하..

마음의 무게/임내영

몸이 아프면 솔직해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욕심이 생겨 악다구니로 버텼는가 싶다가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해 나중에 전부 포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죽지 못해 모든 걸 내려놓기보다는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아플 때 무게가 줄어들겠지 걱정 한 줌 꽃씨처럼 날려 버린다 시집 -------------------------------- 千尺絲綸直下垂 천척 사륜직 하수 一波纔動萬波隨 일파 재동 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 한어 불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 공재 월명 귀 천 길 물 밑에 낚시 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렁이자 만 물결이 따라 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물고기는 물지 않고 빈 배에 달빛 가득 싣고 돌아오네. -冶父道川 禪師- --------------------------..

엄마의 가을/김옥순

틀니를 두고 놀러 나갔다 종일을 잇몸으로 살고 저녁 식탁에도 잇몸으로 앉는다 공원에 간다고 부채는 한 보따리 챙기고 옷은 반소매 위에 가을옷 모자 밑으로 땀방울이 주르르 염색은 아흔여섯까지 하겠다더니 아직 아흔셋인데 말이 없다 밥을 한 끼니도 안 먹었다고 난처하게 하고, 꼭 챙기던 용돈도 이제는 챙기지 않는다. 시집 . ---------------------------- ‘엄마의 가을’ 詩題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여성은 생물학적 性이다. 여성과 남성 외에 또 하나의 性을 정의 하고 싶다면 필자는 당연히‘엄마의 性’, 즉 ‘母性’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의된 여자로서의 성이 아닌 모성은 여자의 성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한정시킬 수 없는 ‘엄마의 성’이다. 어쩜 모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당을 쓸며/박미현

촛불이 타고 있는 새벽 산사 빈 마당에 비질을 한다 젊은 스님이 다가와 무얼 쓸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쓸고 있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멋쩍게 대답을 한다 비질을 할 때마다 잔돌이거나 박힌 잎이거나 흙먼지거나가 벌떡, 벌떡 일어선다 백팔번뇌가 십팔번 뇌로 떠오르던 법당! 비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죽비를 맞은 것 같다 시집 --------------------------------- 부처가 성불하고 맨 처음 가르친 것이 바로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겹의 길이다. ‘苦集滅道’와‘八正道’이다.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란 우리의 삶은 괴롭고. 그 괴로움은 집착에서 오고, 그 집착을 끊어야 할 길, 그게 바로 팔정도이다. 어쩜 시인은 속애(俗埃)에 지친 삶의 괴로움과 번뇌의 일상..

구멍/구정혜

썰물이 나간 사이 갯벌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작은 게 한 마리 찰진 흙 온몸에 뒤집어쓰고 구멍을 파고 있다 산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일 구멍만큼이나 자기 세상이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완벽을 노력했지만 내 마음 뒤집어 보면 곳곳에 구멍 투성이다.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오고 햇볕도 파고들고 친구도 왔다 간다 더러는 달도 제 짝인 듯 넌지시 맞춰 보는 _ 芝堂 구정혜 시인 -------------------------- 필자는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다만, 북적거리는 여름 해변보다는 한적해서 홀로 걸으며 썰물 때 드러난 갯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날아든 조류들, ‘드러냄과 들어옴’의 드나듦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시인은 썰물의 갯벌에서 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작은 집게발로..

쉰이 넘어서야 강을 보았습니다/금미자

대책 없이 밀려 밀려온 여기 세상이 잠시 숨을 죽입니다 세찬 바람이 가슴을 휘몰아 간 오후 지금은 맑고 조용합니다 노송 한 그루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장작을 패고 따뜻하게 쌓는 일 구수한 밥 냄새에 뭉근한 기다림을 배웁니다 황망히 떠나버린 시간속의 사람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정표를 잃은 내가 서있고 또 다시 바람이 일렁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도 성근 볕이 들고 분주했던 시간들이 차례차례 줄을 섭니다 쉰 고개 넘어, 이제야 나는 강을 보았습니다 넉넉함으로 나를 푸근히 안고 느릿느릿 바다로 함께 갈 강을 만났습니다. _금미자 시인 -------------------------------- 여행이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곳으로 떠남이다. 삶의 여정 또한 이렇다고 할 때 태어난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마주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