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연기법 – 생각하라 그리고 깨달아라.

홍영수 시인(jisrak) 2023. 11. 20.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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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생활하며 가족, 회사 그리고 다양한 성격의 집단 속에 함께 어울려 살아간다. 그러면서 인맥, 학맥, 혈맥 등의 차이와 갈등에서 오는 불평과 불만을 맞게 되기도 한다. 특히 개인의 사리 판단과 고정불변의 사고로 타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아전인수격으로 재단하는 경우엔 그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서 심각한 갈등을 초래한다. 누구든 경험했던 일이지만, 실제로 부딪혔을 때는 생각보다 커다란 좌절을 느끼고 상처를 입기도 한다.

 

이처럼 타인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고 고통받게 하는 행위는 아상我想이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몸과 마음이 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아상을 가지고 남과 맞서고 대립하며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는 이분법적인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해 여름 사찰 탐방을 나섰는데, 자그마한 사찰의 대웅전에서 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위를 올려 보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낮추고, 숙이고, 엎드리는 모습에서 신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차원을 떠나 그 어떤 숭고미를 느꼈다. 그때 아상我想인 나의 상을 버리는 모습이 바로 저 모습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면서 절을 한다는 게 나를 낮추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개를 들면 타인을 낮춰보는 것이고 엎드려 절을 하면 나를 낮추고 타인을 높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절을 한다는 것은 我想을 떠나고 버리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에 잠기면서 나만의 시각으로 남을 재단하거나 분별 의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아상을 버리면 내가 없는 무아無我인데 무아가 곧 연기법은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탐방의 시간이었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로써 그 어떤 것이 먼저 결정되고 그에 따라 다른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는 연기법은 상호의존적 관계이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연因緣에서 은 직접적인 원인을 말하고 은 간접적 원인이다. 그 어떤 것도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불변의 성질은 없고 자아도, 브라만도 없는, 우주에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촌에 가면 쟁기, 호미, , 곡괭이 등 모두 다른 용도로 쓰이는 도구이지만, 하나로 묶어 농기구라 한다. , 돼지, 개 등도 각기 다른 생명체이지만, ‘동물로 묶는다. 이렇듯 비슷한 공통성에서 핵심적이고 변치 않는 실체를 찾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힌두교에서의 아트만이나 브라만교에서 브라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연기법은 이러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반문한다.

 

예를 들어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연주나, 또는 타레가가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주하면 최고 멋진 음악이 되지만, 겨우 7음계만 아는 필자가 기타로 연주하면 음악이 아니라 소음으로 들릴 것이다. 이럴 때, 그 기타를 악기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님, 자클린 뒤프레가 첼로 연주를 연주하는 첼로와 비교해서 카페 장식을 위해 벽에 걸어 놓은 첼로를 악기라고 할 수 있을까? 결코, 제 옆의 기타나 벽의 첼로는 악기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악기가 어떤 조건이나 어느 연주자를 만나는가에 따라 악기도 되고 그저 하나의 장식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건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는 것이 바로 연기적 사고이다. 한마디로 악기의 본성은 없듯이 어느 것도 불변의 본성은 없다.

 

회사에 근무할 때의 와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의 가 같을까? 밥 먹기 전과 밥 먹은 후의 는 동일한 일까? 몸의 세포는 순간순간 수없이 생멸한다는데 그렇다면 1분 전의 나와 1분 후의 나는 생물학적 연속성이나 동일성은 없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연기법 측면에서 보면 생물학적 자아는 없다. 한마디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우리가 동일성의 실체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눈에 보인 것을 쉽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가 승단을 만들 때 출가자들만 받아줬다. 원래는 브라만만 받아야 했다. 그렇지만, 살인자도, 다른 종교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여성들도 받아들였다. 본성이 연기적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신분의 차별이 없어서이다. 연기법은 신분 없는 사회의 현대적 관점과 매우 부합한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연기적 사고는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과 다르게 조건에 따라 그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사고방식이다.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와 그리고 도덕, 윤리 등에서 과학의 진리와 충돌하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연기법이 아닌가 한다. 독립적인 실체를 부정한다는 측면에서 불교와 양자역학은 어느 정도 차이점은 있을 수 있지만, 공통적인 관점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는 입자들이 서로 관계가 있으면, 분리되어 있고 멀리 있어도 동시에 상호작용을 한다는 측면에서 연기법과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불교가 보여주는 세계성은 원인을 확인하는 무조건적인 신앙이 아니라 깨달음을 추구하고 그 깨달음은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실존의 다양한 형식 속에 담겨있는 내재율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연기법은 삶을 직시하는 시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철저한 이해의 종교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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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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