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는 대부분 동네 한가운데 아님, 다른 한편에 정자나무가 있다. 수령이 오래되어 수피는 울퉁불퉁하고, 올곧지도 못하고 수 없는 세월의 풍파에 가지가 꺾여 있기도 하다. 언뜻 보면 그 정자나무를 베어서 목가구나 집 짓는 대들보로 쓰기에는 부적절하다. 그렇지만, 한여름에는 동네 사람에게 그늘을 제공하고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유용有用하지 못할지라도 그 유용하지 못함 속 무용無用함으로 그늘과 놀이터가 되는 것에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뜻을 새길 수 있다.
그렇다면 ‘쓸모 있음(有用)’과 ‘쓸모없음(無用)’의 판단 기준이 있을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쓸모 있게 사는가, 쓸모없게 사는가에 대한 차이는 무엇일까? 장자는 이러한 물음에 『莊子』 「人間世」편에서‘상수리나무와 목수 장석과의 만남’에서 답을 하고 있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귀엽게 행동하는 고양이는 사람에게는 애완동물이지만, 쥐의 입장에서는 먹잇감이 될까 봐 두려운 존재이고, 그토록 아름답다는 왕소군이나 초선이는 물고기한테는 피해야 할 한낱 인간일 뿐이고, 지렁이는 그녀들의 발에 밟혀 죽을까 봐 빨리 숨어야 할 두려운 인간일 뿐이다. 이렇듯 각자 입장에 서서 바라보고, 구분 짓고, 분별하는 관점 때문에 한편에서 유용함이 다른 한편에서 무용함이 되고 또한 역으로 바뀌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눈먼 자식이 효도하고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는 것과 같다.
성경(디모데후서 2:20-2)에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만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그릇만 다양하게 있는 게 아니라 세상살이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비록 천해서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쓸모 있음의 유용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생물체든 사물이든 간에 미시적 시선 즉, 자기만의 시선에는 아무 곳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거시적인 시선 즉, 상대적 관점에서는 그토록 쓸모없다고 얘기하는 그 쓸모없음이 쓸모 있음의 무용지용이라는 의미로 다가온다. 소크라테스에게 걸레를 빤 물로 머리 위에 퍼부었던 그의 악처에게는 독배를 마시고 죽은 소크라테스가 불필요한 존재였는지 모르지만, 우린 그가 설파했던‘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간직하고 있다. 또한, 공자는 다른 사람이 몰라 준다고 화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쩜 이러한 사실들이 무용지용의 또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의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리는 닭보다는 울지 못하는 닭의 생명은 더 짧을 수밖에 없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게 해주는 닭보다는 울지 못하는 닭은 쓸모가 덜 했을 것이기에 사람의 먹잇감으로 먼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무용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시선으로 재단한 것일 뿐이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은 <장진주>에서 “하늘이 내게 주신 재능은 반드시 쓰일 곳이 있으니/천금을 모두 쓰더라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天生我材必有用 千金散盡還復來)”라 했다. 그렇지만 그가 생각했던 대로 쓰임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그 쓰임을 얻지 못한 무용 때문에 주옥같은 그의 쓸모 있음의 시를 노래하고 있다.
어찌 보면 명예와 권력과 부를 추구하고 갈망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수동적이고 세상을 피하려는 듯한 관점이어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무용지용론’를 보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궁극적인 삶의 목적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권력과 명예와 물욕 등등의 외물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과 자신에 내재해 있는 참된 자기를 깨닫고 실현하는 데 삶의 목적을 두는 것 중에 과연 어떤 것에 목적을 두면서 삶의 가치 실현을 해야 할 것인가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사실 장자의 인식 전환의 핵심은 변화론이 아닌가 한다. 하나의 현실적인 생물체가 다른 생물로 변화한다는 것은 사실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서 변화론은 물리적인 변화가 아니라 정신적 변화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고정된 시선과 가치 기준이 바뀌어 변화할 때 우린 새롭게 다가오는 사물을 느끼고 볼 수 있다. 有用이냐, 無用이냐에 대한 가치판단을 나의 사고와 분별 의식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는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머물고 싶다” 하면서 이 중간조차도 참된 ‘道’가 아니라고 한다. 그는 유용과 무용의 중간이 아닌 유무용의 양극단마저 초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 그게 ‘道’에 한 걸음 더 가깝게 접근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자가 볼 때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에 대한 의미 부여는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그 어떤 가치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선악, 미추, 진위 등에 대해 나를 기준으로 판단한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감각적인 지식은 어디까지나 어떤 상황이나 나의 상태에 따라 상대적 의미라는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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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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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257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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