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당시에는 교련복을 입고 조회를 하는데 모든 학년이 운동장에 모였다. 3학년 1반의 학급이 2열 종대로 뒷짐 지고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던 중, 직책 때문에 맨 앞에 홀로 서 있는 나에게 담임 선생님이 천천히 걸어오셨다.
무슨 일인지 자꾸 내 교모를 쳐다보시면서 한 바퀴 돌아서더니 갑자기 제 볼때기를 잡아당기셨다. 그 모든 후배와 동급의 학생들, 더구나 공학이어서 여고생도 있는 앞에서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웃으면서 조용히 ‘아! 선생님’이라고 하는 순간, “뭐, 이놈의 자슥아! 뭐가 고장 났다고? 니가 뭣이 고장 났어? 허허 또 수리까지 한다고야?” 하시면서 웃으시는 듯 약간의 화가 나시는 듯 나중에는 귀를 몇 번 잡아당기셨다.
솔직히 전교생 앞에서 좀 창피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용한 조회 시간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당시 필자 모교의 교모는 흰 테두리 두 개가 둘려 있었다. 그 흰 두 줄의 윗줄에는 ‘고장 난 인생’이라고 볼펜으로 쓰고 바로 아랫줄에는 ‘수리 중’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을 담임(지리과목) 선생님께서 우연히 보신 것이다. 다행히 조회 시간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가는 불행?은 없었고, 순간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좀 머시기 하기는 했다.
그 뒤로 흰 테두리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선생님 안 보이는 곳을 찾아서 쓰려고 생각했다. 당시 하복 교복 바지는 쑥색 바지였는데 그 바지의 무릎 부분에 볼펜으로 지워지지 않게 “고장 난 人生 수리 중”이라고 한자 ‘人生’을 넣어 다시 쓰고 다녔는데 다행히 졸업할 때까지 모르셨다. 다만 킥킥거리는 친구들만 알고 있을 뿐, 그러했던 난 지금도 여전히 ‘수리 중’이다.
나에게 10대와 20대는 과연 무엇이고 어떤 시기였을까? 그 시기를 돌이켜 보면 얼굴을 파묻고 싶고, 감추고 싶은 통증을 느끼는 염증의 시기였다. 물론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철저히 부숴버리고 무화해 버리고 싶었던 그때 그 시절, 솟구치는 젊은 패기의 욕망과 희망, 그리고 좌절과 절망의 교차로에서 어디로 가야 하고 어느 곳으로 걸어가야 할지 모르는 방향 잃은 방황의 시간들이었다. 흔히 말한 슈투름 운트 드랑 (Sturm und Dran), 질풍노도의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군가에 대한 불신도 없으면서, 이유 없는 이유의 반항을 하고, 특별한 목적의식도 없는 맹목적인 것에서 오는 회의감과 한편으로는 야수적이고 악마적인 그 어떤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죄책감과 자의식, 그리고 치솟는 욕망 등은 이 시기를 표상하는 단어들이었다.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기도 하고, 방황하고, 반항하면서 시도해보지만, 결코 피할 수 없고 몸으로 부딪치고 겪어야만 했던 시기였다.
그 심층의 밑바닥에는 대학 진학의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과 좌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제반의 상황과 여건들을 동의하기 힘든 동의를 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다만, 나뿐이 아닌, 대부분 그 시기의 시골 학생들이 겪었을 시대적 상황이었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질풍노도의 시기는 먼 동트는 새벽녘의 시간이고 시기이다. 그리고 다가오는 미지의 세계가 펼쳐지기 때문에 설렐 수밖에 없다. 더불어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함께 한다. 그렇지만, 내 손과 발과 머리와 가슴으로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는 깨달음의 시기이기도 했다.
지금은 육체와 정신이 동시다발적으로 삐거덕 소리와 함께 정신줄 놓게 되는 그야말로 고장 난 시기를 맞게 된 육순이다. 우리가 새벽을 맞이하려면 잠에서 깨어있어야 하듯이, 그리고 젊음이 새벽이라면 황혼의 육십, 그 육십의 노을은 또 다른 새벽이기에 노을을 맞이하려면 가슴과 머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곧 고장 나기 시작한 인생을 수리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슴을 때리는 젊음의 고동, 그 힘과 열정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세월로 쌓아 온 지혜와 지성, 그리고 축적된 경험의 밑바탕에는 그 어떤 빛보다 환한 빛을 발할 수 있기에 고장 나고 허물어지고 부식되어가는 육체와 가물거리고 느슨해진 영혼을 다잡으며 수리해야 한다. 그리고‘수리 중’이어야 한다. 거침없이 밀려드는 밀물의 풋풋한 소리도 좋지만, 채웠다 비워가는 썰물의 농익은 소리 또한 좋지 않은가.
아파트 단지 분리수거 장소에 가면 수없이 버려지고 있는 다양한 것들이 고장이든 아님, 오래되어서 버려졌든 간에 날짜에 맞춰 쓰레기 차에 실려 처리장으로 간다.
그렇지만 사람은 다르고 달라야 한다. 분리수거함에 있는 것들은 얼마든 대체 수단이 있지만 ‘나’라는 상품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비록, 고장 나고 허름해지더라도 수리하고 다듬어야 한다.
우린, 살며 살아가며 영과 육이 훼손됨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고장 난 인생’을 경험할 때는 바로 수리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닷가의 몽돌은 수 없는 파도와 폭풍의 부딪힘에 온몸 닳아가는 상처를 입는다. 그렇지만 깨지고 부서지는 아픔을 안고 알몸 맨살 버무리고 다스리며, 마모되어가면서도 평생 참선하듯 반짝이는 한 알의 도(道)가 되어 누워있다. 지금도 여전히 다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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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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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16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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