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거울 앞에서 본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특히 거울 속에 비친 나이 듦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특히 흰 머리카락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무더위와 태풍이 지나가고 벌써 상달, 10월이다. 이미 가을은 무르익어가고 있다. 아! 가을인가 하면 벌써 겨울이 온다. 이러한 느낌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그렇다. 이 무렵 항상 떠 오른 시구가 주희의 7언 절구, 권학문이다. 그중 경구와 미구, “연못가에 돋은 풀들이 봄 꿈에서 깨기도 전에, 섬돌 앞 오동나무 잎 벌써 가을 소리로구나(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세월의 빠름을 얘기하며 학문을 권한다. 六旬의 나이, 아직도 마음은 나이 듦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 이미 머리는 白頭翁이 되어가고 있다.
다시 한번 거울 앞에 서서 유심히 얼굴을 훑어본다. 그 젊디젊은 시절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머리엔 백두화(白頭花), 흰 머리 꽃이 피었고 윤기 없는 피부와 주름살에는 살아온 만큼의 세월이 퇴적되어 있다. 정말 눈 깜짝할 세월 속에 젊음이 아닌 나이 듦으로 서 있다. 신문과 방송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그 많은 권력과 욕심과 탐욕 덩어리였던 얼굴들도 이미 볼 수 없으니 도연명의 시구처럼 젊은 시절 다시 오지 않고 새벽이 두 번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歲月不待人)라고 읊조린 시구가 전과 다르게 스민다.
나이 들어 백발이 되어간다는 것은 머지않아 이승과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는 징후이기도 하다. 까맣게 염색하고 새치를 뽑는다고 해서 감춰질 뿐, 징후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인 杜牧은 그의 시 <송은자送隱者>에서“세상의 공평한 도리는 오직 백발뿐이라, 귀인의 두상에도 일찍이 봐준 적이 없네(公道世間惟白髮, 貴人頭上不曾饒)” 라고 했다. 찾아오는 백발 받아들이고 올바른 옛사람의 마음가짐의 자세로 표변(豹變)하는 군자가 되자. 창부타령에서도 “아~~다리리 어야, 아니 노진 못하리리. 공도(公道)라니 백발(白髮)이요 면치 못할 것은 죽엄이로다.” 했듯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드는 도리 앞에 백발공도의 순리에서 나이 듦을 사유하자.
인생은 생각보다 짧다. 물론 지금은 발달 된 의학의 혜택으로 수명을 연장하고 있지만, 세월이 닫는 대문 소리는 여전히 내 등 뒤를 사정없이 때린다. 매 순간의 세월은 나를 집어삼키고 는개가 움츠린 내 몸을 서서히 적시듯 흐르는 시간은 내 몸에 바짝 스며든다. 지금도 여전히 나이 듦의 입장에서 돌이켜보면 인생은 짧다. 인생이 짧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완성하지 못한 무의미성, 추구한 바를 이루지 못한 회한의 감정,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후회 등이 아닐까 한다.
삶의 고난과 역경,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고 살아오다 결국엔 허무함을 느낀다. 그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 또 다른 시작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름 到彼岸을 위해 열심이었고, 예이츠가 이니스프리를 갈망하듯, 무릉도원의 이상향과 피 끓는 혁명가의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정작 보지도, 잡지도, 누리지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한 꿈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고 지금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적이 누구였던가를 되돌아보니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알았다.
젊음은 나이 듦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앞당겨 경험하지도 경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듦에서도 젊음에 대한 이해나 판단 역시 자신이 젊음이었을 때와는 다르다. 그것은 젊음과 나이 듦에 대한 감정이 마음속에 혼재되어 대립하고 수용하기도 하면서 절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나이가 들수록 대부분 자신의 시간이 아닌 남들의 세계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다. 경로당이나. 또는 수많은 나이 듦이 모여드는 서울 파고다 공원 근처의 풍경을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일부는 소비적 여흥의 시간 투자가 아닌 예술가의 작품 세계를 관람하는 생산적, 진취적 사고의 나이 드신 분도 많다. 때론, 서점에서 시집이나 전시회에서 미술품 등을 구입 해 자신을 내면화한다. 이러한 시집이나 미술품이나 조각품 등의 예술 작품은 우리의 삶, 특히 나이 듦의 삶을 풍요롭고 지혜롭게 한다. 세계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그래서 완성을 향해 가야만 한다. 나이 들수록.
90살의 고령에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설계를 멈추지 않았고, 사마천이 궁형(宮刑)을 자처하면서도 <史記>를 저술했고 또한, 스트라빈스키는 항상 오선지를 품고 살았고, 피카소도 붓을 꺾지 않았다. 이처럼 생의 저물녘에서 그 무언가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늙바탕 황혼 녘의 삶을 사유하고, 희망하고, 기대해야 한다. 살아온 생의 무게가 기쁨이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늙어가지만 젊은 노년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필요하다.
아일랜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1856〜1950)의 묘비명 보자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라고 새겨져 있다.
그렇다. 어느 날 문득 날줄과 씨줄의 촘촘한 삶이었던 내가 이제 다시 돌아보니 올이 성기고 풀어진 삶이 되어간다. 늙음은 한 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歸不歸). 황혼 녘, 저무는 삶이 아닌 물드는 삶을 살아가자.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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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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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osmiannews.com/news/17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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