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물질문명의 풍요로움과 다양한 대중매체의 발달 등으로 외형적으로는 넉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적 삶까지 풍요롭지는 않다. 오히려 광대무변한 정보와 지식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기보다는 오히려 절대가치의 상실과 혼란을 겪을 때가 많다. 그런데도 이러한 문제점들에 대한 보다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니체는 자신이 살던 시대를 허무주의 시대라고 파악했다. 그는 왜 허무주의라고 판단했을까? 허무주의란 개인을 옭아매고 간섭하는 절대적 가치체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이유는 그 시대의 절대적 진리나 신이라는 존재가 허구였음을 깨달음으로써 불안과 상실감으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해서 방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주의 도래한다고 했다. 니힐리즘(Nihilism)이라는 어원은 라틴어로 ‘無’란 즉, 없음의 뜻인 nihil에서 나왔다.
니체는 이러한 허무주의에 나타난 현상과 원인을 다양한 방법으로 파악해서 허무주의를 겪는 사람들의 무력감과 피로감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현실의 삶을 긍정하고 자기 극복 의지를 실현하는 모습을 영원회귀와 위버멘쉬 즉, 초인(超人)을 통해 허무주의와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허무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 가치들이 탈가치화 하는 것. ”이라 했다.
문명은 앞으로 나아가고 경제는 발전하는데 무엇이 잘못되어 이런 역설적인 현상이 생겨날까. 이럴 때 니체는 해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문명을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본 것이다. 삶의 가치와 목표와 의미를 상실하고 헤매고 있다는 것이다. 새롭고 가치 있는 미래에 도전하기보다는 낡은 가치관에 얽매여 있다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니체 철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지금처럼 허무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오늘날 대다수 사람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 그래서 삶의 희망을 상실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AI와 같은 정보통신의 발달과 바쁜 경제적 활동으로 정신없는 오늘날, 이러한 사회는 점점 허무의 발걸음이 빨리 다가옴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에서는 이러한 현실과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 니체 철학을 통한 극복의 방법은 허무주의의 현실 속 인간의 삶에서 희망을 건져내고자 한다. 그것은 삶의 가치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하며 노력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수동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현실에 예속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창조하며 더 나은 인간의 길을 추구하는 ‘능동적 허무주의’이다. 틀에 박힌 규율이나 정해진 길이 아닌 그것을 횡단하는 자유 정신을 추구하는 위버멘쉬, 즉 초인(超人)이다.
삶에 의지로의 아모르파티를 주장했던 니체는 “용기는 최상의 살해자다. 특히 공격적인 용기는!.” 라고 했다. 우린 낡은 가치관에서 오는 무력감과 패배감에서 탈출하여 나를 옭아매는 가치관을 도끼와 망치로 찍고 부숴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나 다른 사람들이 맞춰놓은 의식과 가치관에 무조건적인 순응보다는 나만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즉, ‘나만의 가치’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때 낙타와 사자에서 위버멘쉬(Übermensch), 초인(超人)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자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중세 사회는 신이 창조한 세상이었고, 인간 또한, 신의 창조물이었다. 신의 한마디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했던 바로 암흑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예술과 모든 학문은 신학의 하인이었다. 이러한 시대의 허무주의는 인습화된 일체 권위와 전통, 그리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들의 철저한 거부이고 부정 의식이었다.
어느 해 겨울, 설악산 대청봉을 오를 때의 기억이 난다. 어둑새벽, 백담사 입구에서부터 시작한 등반은 랜턴을 켜고 산악 대장의 안내에 따라 쉼 없이 오르고 또 올랐다. 도중에 오세암과 대피소도 만나는 기쁨도 있었지만, 눈보라 속 육체와 정신은 점점 힘들어져 갔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정상인 대청봉에 도착해서 표지석에 서서 한 컷 촬영하고 난 후 사방을 바라보는 벅찬 희열과 해냈다는 자존감은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니체에게 있어서 고통과 역경은 거부하고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저항적 성격을 지닌다고 하면서 그는 “인간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했다. 그렇다. 중력을 이기면서 높은 대청봉을 오를 때의 육체적 정신적 나약함을 자책하거나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뎌내는 만큼 성숙하고 이겨낸 만큼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정상에 휘몰아치는 거친 눈보라는 오히려 정신과 육체를 단련시키는 역동적인 자연의 존재로 다가왔다. 바슐라르의 “삶은, 차가운 삶은 추위로써 고양된다.”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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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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