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편제>는 평소에 판소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그 이유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품고 있는 恨과 슬픔의 정서를 영화 속 판소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은 완도항에서 배를 타고 1시간쯤 후 도착하는 청산도이다. 그 섬의 구불구불한 길과 해안선, 황톳길에 돌담 등은 왜 감독은 이곳을 택했을까? 하는 의문을 벗어나게 한다. (필자는 영화 속 배경 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많은 열녀비와 다랭이논, 그리고 고인돌과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공동 우물터였다)
우리 민족은 유난히 춤과 음악을 좋아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종교적 제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하는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舞天' 등 제천의식의 기록이 잘 말해주고 있다.
요즘과 같은 글로벌 시대, 지구촌 시대에 절실한 것은 잊혀가는 우리 것에 관한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악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가지고 우리의 소리이고 정서이면서 문화의 원형질인 국악을 잘 다듬고 가꿔 나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젠가 고향 해남의 여름휴가 때, 대나무 숲 속의 폐가에서 우연히 판소리 명창 임방울의 <國唱 林芳蔚 特選曲 쑥대머리> LP판을 발견했다. 그것도 흠집이 거의 없는 死後 1976년 레코딩한 명판이다. 거기에 실린 판소리는 SIDE 1 <쑥대머리, 獄中相逢歌>, SIDE 2 < 湖南歌, 綠水靑山, 軍士서름(三國志中 (1),(2).(3))>.이다. 어릴 때부터 임방울 명창은 이곳 지방 출신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이름이었다.
판소리는 다채로운 특징을 갖는다. 인간사 喜怒哀樂을 판소리 사설을 통해 씨, 날줄로 얽어매어 변화무쌍한 소리 가락을 이룬다. 흔히 얘기하는 해학미와 골계미, 그리고 비장미이다. 그 많은 판소리 명창 중에 임방울의 <쑥대머리>는 자다 일어나 들어도 좋다고 했다 한다.
쑥대머리는 춘향가 중 옥중가의 한 부분이다. 감옥살이하면서 억울하고 참담한 상황과 이도령에 대한 춘향이의 그리움이 더욱 처절해지는 그리하여 마침내 생의 마지막 의미로 간절해져 있는 노래이다. 임방울은 슬프고 애절한 음색과 꺾고 치켜올리고,, 궁글리고 뒤집는 발성의 다양성으로 그의 귀명창들이 많았다. 특히, 恨의 피를 토하는 듯 지르는 소리와 가락은 비장미가 넘쳐났다. 그는 소화제 없이도 판소리 사설을 잘 소화한 당대의 명창이었다. 한여름 고목의 정자나무 아래 그늘처럼 임방울의 천구성은 그늘을 친다. 그것은 곧 융숭 깊은 맛과 멋, 그리고 오묘함과 피를 토하는 노력과 공력, 그 시간의 끝에 핀 높은 경지의 ‘시김새와 그늘 꽃’이다. 이것이 임방울의 특징일 것이다.
판소리 <쑥대머리> 뚝사발에 텁텁한 막걸리를 가득 부어 새끼손가락으로 한 번 후 젓고 단숨에 마시고 난 후 소매 끝으로 한 번 쓱 문지르는, 바쁠 것 없는 느림의 진양조 장단이다. 어찌 커다란 유리잔에 거품 걷어내며 몇 번에 걸쳐 마시는 맥주의 맛과 비교하겠는가. 그 맛과 멋과 품새와 분위기, 유약도 제대로 입히지 않고 거칠거칠한 뚝사발에 숟가락, 젓가락과 맞닿을 때의 질박함, 그 뚝배기에서 터져 나온 폐부를 가르는 꾼의 소리, 그 꾼의 창법에서 나오는 판소리의 근원적 미감은 뚝배기에서 오는 느낌과 동일 미를 맛볼 수 있다.
춘향이, 저토록, 모진 매를 맞고 적막한 옥방에…, 보고지고 보고지고, 피 토하는 처절한 귀신 형용의 쑥대머리, 그 울부짖음은 우리 시가 문학에서 恨의 백미로 꼽히지 않을까. 임방울이 울부짖을 때, 일제 강점기의 암담한 시기였다. 그 치하에서 통곡하고 싶은 한국인들에게 애조 띤 계면조 성음의 판소리로 어루만져주고 또한, 분노를 삼키며 살아가는 민족의 가슴속에 그의 <쑥대머리>는 맥놀이로 공명했을 것이다. 또한, 천하 명창 임방울이 전국 방방곡곡에 그의 소리가 우꾼할 때였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판소리에서는 어떤 상황에 맞게 묘사하기 위해 사설이 다 표현하지 못하는 내용에 접근하도록 새소리, 바람 소리 등의 실제적 음을 묘사한다. 예를 들면, 새소리의 쑥국쑥국, 솟탱솟탱 등의 청각적 요소를 그림으로 묘사하듯 하는 것이다. 서양 음악에서 마드리갈리즘(madrigalism), 또는 음화(音畫, tone painting) 등이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것을 판소리에서는 ‘이면’이라 한다. ‘소리 그리기’이다.
이면을 보다 세련된 예술로 보다, 구체적으로 그려 낼 수 있어야 비로소 청중들이 만족감을 느낀다. 임방울, 그는 소리의 맛과 멋을 내기 위해 곰삭히고, 소리도 잘 그렸고, 또한 사설치레의 조건을 지닌 득음의 최고봉이 아니었을까. 필자는 다시 한번 임방울의 LP판을 들어본다. ‘귀신 형용’을 ‘구신형용’이라 한다. 재밌다.
온 방문과 창문을 모두 닫고 티브이를 보는 옆지기에 다가가 쑥대머리 한 대목 권한다. “쑥~~대~머리”하고 툭 던지는 소리가 춘향이의 적막옥방에서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맛 가운데 눈물을 쏟게 하는 맛이 있다면, 임방울의 쑥대머리 소리의 맛이 아닐까 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옆지기의 사설은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호접몽을 어이 꿀 수 있나”의 대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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