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문학회에서 안동 하회마을에 갔었다. 그때 ‘하회탈 놀음’의 공연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탈놀음이나 가면 놀이는 해학과 풍자의 놀음이라 할 수 있다. ‘가면’은 그리스어로 페르소나다. 한마디로 가면을 쓴 인격을 말하는 것이고, 이미지 관리를 하기 위해 쓰는 ‘외적 인격’이기도 하다.
우린 여행을 즐기기도 한다. 시계추 같은 시간에 맞춰 출퇴근해야 하고, 틀에 박힌 일상 탈출을 꿈꾸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는 위치와 얽매인 듯한 생활환경을 벗어나 도망가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가면을 확 벗어버리고 실재적 상황에 뛰어들어 걷고 싶고 만세 부르듯 두 손 들어 어깨를 활짝 펴고, 자유함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사회의 규범과 역할을 벗어나, 요구하는 도덕과 윤리 의무 등 때문에 감춰진 본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다시 페르소나 속으로 돌아올지라도 탈출에서 느꼈던 자유함과 그 느낌을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해, 부천에서‘부천중앙공원 프린지 무대’라는 슬로건 아래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펼친 축제 분위기의 공연을 봤던 기억이 난다. 프린지 문화는 주류(main stream)가 아닌 비주류(nonmain stream) 또는 변방문화를 일컫는 말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중심에 합류하지 않고 벗어나 독립적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의 문화, 어찌 보면 길거리 문화라고 할 있는 그들의 공연에서 벗어던진 일상의 얽매임을 벗어버리고 페르소나를 탈출한 그들의 공연을 보았다. 지금은 팬데믹을 불러온 코로나 19로 인해 다양한 문화 예술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어 아쉬울 뿐이다.
20여 년 전 영월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을 찾았다. 김병연(일명 김삿갓: 金笠), 그 잠든 곳이다. 그의 통쾌한 풍자시를 만나러 가족과 함께 갔었다. 김삿갓이야말로 시대의 거대 담론에 화합하지 않고, 당대 주류 사회를 예리하게 때로는 희화(戱畵)하면서 비웃고 비판하며 전국을 떠돌아다닌 변방의 노마드 적 삶을 살다 간, ‘페르소나’라는 감옥을 탈옥한 시인이 아닐까 한다. 그러한 김삿갓을 부평초처럼 떠돌아다닌 방외적인 삶과 풍자 시인으로만 이해하고 있지만, 그의 생애와 사상을 들여다보면, 민중 생활의 애환과 사회 부조리를 타파해야 한다는 개혁의 의지가 넘쳐났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대적 제약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진 한 인간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비록 그의 생애와 무관하게 말이다.
조선 후기 시대상을 축소판처럼 보여준 그의 인생역정은 오늘날 되새겨 보아도 절망하게 하는 시적 아픔이 있으며, 그는 또한 19세기 중반 이후 시대 밖에서 시대 복판을 활보한 시객(詩客)으로서 다중성(多衆性) 또는 복수성의 얼굴이기도 하다. 봉건 말기에는 지식인의 분화된 모습들이 보이는데 그가 보았던 이 땅의 시대상은 그의 시 솜씨를 통해 되살아났다.
이러한 그를 통해 신분제 사회에서, 특히 喜怒哀樂의 감정 표출을 금기시한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한 시대에 불우한 한 지식인이 그 아픔을 안고 살아가면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고, 절망 속에서 詩라는 희망의 씨앗을 뿌리며 통곡해야만 했던 그 자취를 더듬어 걷고 싶었다. 한마디로 당대 시대의 변치 않던 한문과 한시의 변치 않는 고정된 틀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를 했던 그이기에 더욱 그랬다.
18세기 이후의 조선에서도 이러한 공안파 문학이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많은 문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볼 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흐름의 결과물이 김삿갓의 시에서도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한다. 물론 Trivialism(쇄말주의瑣末主義)적 비판의 소지는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삿갓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본 견해일 뿐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詩의 格과 式이 아니라 내재하고 있는 자신의 사상을 표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격식을 가지고 그의 시를 평한다면 이것은 극히 초보적인 문학도의 사고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김삿갓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방인이 된다. 어떤 시들을 보면 한자나, 한글로 시를 쓰면서도 두 언어의 교차지점에서는 또 다른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가장 정형화된 시험이다. 그도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이러한 과거시험의 정형성을 비정형적인 문장으로 구사하면서 정형화를 비 정형화해서 확 비틀어버린다. 그 어떤 구속과 구애도 받지 않고 사회를 비판하는 시를 읊조렸던 그가 바로 김삿갓이다. 당 시대에는 한문 문장과 유가적인 삶을 탈피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시대였다. 그런데도 자신을 얽매이고 있는 페르소나를 탈출해서 한 조각 뜬구름이 되어 전국을 산천 주유를 했던, 페르소나를 탈출한 그를 보았다.
묘역 뒤에 있는 한 그루의 은행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 아래서는 새벽에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4명의 중년의 여행객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이 답사를 끝내고 상경하려는 나를 불러 세워 술 한 잔 권했다. 그러면서 김삿갓은 시선이라고 한다. 그렇죠, 어디 詩仙뿐이겠습니까 酒仙이기도 하죠. 이른 아침에 마신 한 잔의 쐬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로 취했다. 이제 탈출 했던 페르소나를 다시 머리에 쓰고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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