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경주시 양동마을에 들러 하룻밤 자고 이튿날 아침 옥산서원(나중에 알아보니 2019년 ‘한국서원’‘한국 서원’의 이름으로 14번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됨)을 찾았다. 이곳은 회재 이언적이 고향에 돌아와 지은 서원이다. 때마침 수리하는 중이어서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독락당(獨樂堂)’을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계정과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7년여의 세월을 보낸 별서이다. 무엇보다 눈에 다가오는 것이 ‘獨樂’이라는 현판이다. 이 두 글자가 왜 그렇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주억거리게 했는지? 아마도 글자 너머의 의미보다는 우선 회재 선생의 사상과 배경 등을 떠나 ‘獨樂’이라는 단어가 바쁜 일상으로 인해 심신이 지친 우리의 모습과 겹치면서 의미심장하게 가슴을 파고든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같이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일수록 번잡하고 시끄러운 일상을 피해 잠시라도 고독과 외로움을 스스로 찾아 즐길 수 있는 여유 아닌 여유가 필요하다. 그것은 ‘홀로됨’‘홀로 됨’을 느껴보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다른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도 홀로 됨의 한 방법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직 혼자되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속에 ‘獨樂’ 즉, ‘홀로됨’을 즐겨보는 것이다. 여기서‘獨樂’의 의미는 ‘혼자서 즐긴다’는 의미가 아닌, ‘홀로됨’을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회재 선생님의 ‘獨樂堂’ 또한 이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이때 고독감이나 외로움에 지친 심신을 ‘홀로됨’ 이 치유하고 위무해 주지 않을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권태로움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짜증도 내고 사소한 일을 가지고 다투기도 하면서 때론 평상시 하지 않은 행동도 한다. 이럴 땐 문학가나 예술가들은 권태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요즘은 이러함을 이겨내기 위해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으로 홀로됨을 즐기기도 하고 그 외 다양한 방법 즉, 독작(獨酌)이나 방콕, 홀로 여행, 산책로, 둘레길 걷기 등으로 ‘홀로됨’을 즐기기도 한다.
또한, 이렇게 분주한 일상을 탈출해 조용한 산사나 고즈넉한 곳의 장소를 찾아 여행하기도 한다. 그때 우연히 또는 예상치 않게 어떤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우린 그러한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 떠나기도 한다. 그 풍경은 관광객 붐비는 관광지가 아닌 자신의 모든 걸 내려놓고, 창고에 저장된 기억들을 문 열고 버리고 난 다음 완연한 무아(無我)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다.
이렇게 자기를 죽이고 버리는 마음의 자세가 나를 위한 아름다운 기도가 될 수 있다. 냇가 바윗돌의 숨죽인 겸허의 자세나, 말 없음과 고요의 언어로 늘 푸르게 서 있는 나무들의 홀로됨에서 볼 수 있는 기도 형식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는 아파트를 그들이 뭔데 올렸다가 내리기도 하고, 조용히 농사짓는 땅에 뭐가 들어선다고 하면서 지네들 맘대로 값을 매기고 그러면서 입에 담지 못할 뾰쪽한 언어의 파편들이 난무하기도 하다. 차라리 귀 닫고, 입 닫고, 눈 감고 있어야 할 판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직 ‘홀로됨’을 즐기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혼란의 시대를 벗어나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도연명(陶淵明)의 시 <음주(飮酒)>를 보면 “동쪽 울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리채국하 유연견남산)”에서 보듯 그는 번잡한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리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은자의 탈속한 심경을 읊조렸다. 이것이 바로 ‘홀로됨’‘獨樂’ 아닐까. 왜냐하면, 시의 마지막 구절엔 “말하려다가 차마 입을 다문다(欲辯已忘言)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홀로됨의 즐거움’에서 그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또한, 강희안의 ‘高士觀水圖고사관수도’를 보면 깎아지르는 절벽 바위 아래 비스듬히 엎드려 흐르는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표정은 근심을 잃어버린 듯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그리고 엎드린 모습은 마치 바위와 한 몸이 된 것 같다. 이렇게 유유자적하며 자연과의 일체가 되는 저 늙은 선비야말로 극치의‘홀로됨’을 즐기는 것이 아닐까.
세상이 한없이 복잡다단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대를 아파하는 문학인과 예술가들의 작품이 어찌 시끄러운 도심 한가운데서만 창조되겠는가. 시적 영감으로 체화시켜 작품으로 탄생시킨 것들은 때론 ‘홀로됨’을 즐기고 곱씹는 것으로부터 새롭게 창작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가끔은‘獨樂’, ‘홀로됨을 즐기기’ 위해서 홀로 되기에 미칠 필요가 있다.
봄이다. 창문 너머 작은 공원에 꽃망울이 맺혔다. 지그시 바라본다. 곧 만개할 것 같다. 피우고 나면 또 낙화할 것이다. 발등에 떨어지는 꽃잎에서 때로는 천둥소리를 듣고 우레와 같은 깨우침을 얻어야 할 것 같다. 가장 빛난 깨우침은 ‘獨樂’,‘홀로됨의 즐거움’에서 우연히 또는 무심코 만난 깨우침이 가장 빛난 깨우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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