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기 좋아해서 일하지 않고, 직장이나 어떤 하는 일 없이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인간, 그래서 누구에게나 또는 어디서나 쓰임이 없는 불필요한 인간, 특히 이러함을 알고서도 행동하지 않는, 한마디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을 ‘잉여인간’이라 부른 것 같다.
물론 이 용어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나 스스로 생각할 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 열심히 하고 가족을 위해 노력하는데도 때론, 타인의 시선에는 쓸모없는 인간, 이상한 사람 등의 잉여적 인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은 누구나 힘든 노동보다는 여가활동을 선호하고 비록, 일에 전념을 한 일벌레일지라도 심신이 지치고 힘들 때면 어쩔 수 없이 얼마 동안 쉬어야 하는 잉여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의 워커홀릭 인간도 도움 안 되는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요즘은 정년 퇴임하고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 많은 나이테를 겹쳐 두른 60세대와 70세대, 아직은 그들의 가슴에는 힘찬 노동요를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다. 그러함에도 젊은 세대를 위한다거나 그 어떤 이유로 이처럼 건강한 노년을 사회가 방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시니어로 접어든 인간은 사회의 뒤안으로 자꾸 밀려나면서 현실과 조응을 잘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간이 오래가면 자기혐오가 짙게 배게 마련이다. 아직은, 아니 지금도 노경(老境)의 황금빛으로 빛나고 싶은데 말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노년으로 취급하며 잉여인간으로 남겨둔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가치하게 취급하는 노년을 남아도는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옛 선비가 비가 오는데도 마당에 널어놓은 곡식을 거두지 않고 과거 응시를 위해 책만 보고 있다든지, 남산골샌님의 딸깍발이가 마누라에게 의지하고 가정에 소홀히 하는 것은 자신의 목표, 즉 과거급제에 몰두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그 선비와 딸깍발이를 한량 같은 잉여의 짓을 한다고 해서 쓸모없는 인간의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직은 실업자이지만, 그래도 주어진 삶을 대충 살아가지 않고 어찌 보면 스스로 사회의 쓰임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강요 아닌 강요를 받아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수동적 인간이 아닌 능동적 인간들은 주변에 많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룸펜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들을 과연‘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그 어떤 일에도 관심도 없고, 흥미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있다. 잉여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삶에서 그 어떤 의미와 가치를 찾지도 느끼지도 못하기에 행동 또한 하지 않는다. 조선 시대의 무위도식하는 양반이네 하는 선비나, 부르주아 계급들
또한, 천박한 갑부들이나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영혼을 상실한 인간들,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극복하지도 못해서 무기력하고 그래서 우울하고 권태로워하고 또한, 사회에 대한 냉담과 회의에 빠져 괴로워하는 인간들.
이렇게 폐쇄적인 사고와 사회에 대한 편견, 그리고 무지에서 오는 절망을 안고 도피하면서 적극적인 사고와 행동 없는 인간, - 이 또한 상대적 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낙오자나 백수처럼 보이는 전형적인 이러한 부류의 인간들을 ‘잉여인간’이라 부르면 안 될까?
지금의 사회에서, 소위 말한 주류임을 자칭하는 고위층과 재벌, 그들과 자손들은 병역도 편법을 이용해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부정하게 스펙을 쌓기도 하고 또한, 힘든 취업의 관문도 뒷배경을 이용해 쉽게 직장을 얻는다. 또한, 같은 죄의 죗값도 차별이 심하다. - 물론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 그대로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의 현상들을 지금도 여전히 신문이나 포털사이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잉여인간’이 아닐까?
이렇듯 사회를 좀먹고 부패시키는 구더기들 같은 뻘짓에 희망을 잃고 절망하는 부류들, 특히 젊은이들은 오죽했으면 스스로 잉여인간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하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백수처럼 보일지라도, 그러한 스펙과 배경과 고위층 등의 특권의식을 가질 수 없어 밤낮 더 나은 앞날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젊은이들을 과연 ‘잉여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자신이 비주류임을 아는 비주류는 이미 비주류가 아니다. 쓸모없이 남아도는 잉여적 인간이 아니다. 온갖 불법적인 형태로 뻘짓들을 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짜 쓸모없고 비판받아야 할 잉여적 인간들이 아닐까.
봄 내음이 상쾌하다. 백목련의 가지 끝에 움트는 새순이 봄을 이끌고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오후다. 귀가 순해지는 나이에 접어드니 뭇 중생들의 시끌벅적한 삶의 발자국 소리가 크고 가까이 들려옴을 느낀다. 그들의 음성들을 耳順의 가슴으로 해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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