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의 플라톤은 육체적 사랑을 악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규정은 천년의 세월 동안 이어져 오다 유럽을 휩쓸었던 르네상스의 폭풍 속으로 사그라진다. 이후 육체에 대한 욕망은 더욱 노골적이고 관능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다.
혜원 신윤복이나 에곤 실레 또한 시대는 달리하지만, 당 시대에 그들만의 시선과 고찰로 에로티시즘이라는 다소 금기시된 주제에 각자의 위치에서 흔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혜원 같은 경우 성리학이라는 보수적 이념의 시대에 과감한 性 담론으로 특히 양반의 이중적인 성 의식에 비판을 가했던 점은 놀랄만하다.
인류 탄생 이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주제가 에로티시즘이 아닐까 한다. 수많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다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것은 곧 에로티시즘이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관심과 주제여서 그렇지 않을까. 또한, 에로티시즘은 감각이나 쾌락 등의 정신적인 것으로 성애(性愛)를 초월하고 존재의 본질을 향한 근원적인 충동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어느 해 꽃잎 추위 속에 원고 마감일이 다가와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카페에 들어섰다. 음식점이나 카페, 또는 주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실내에 장식물이나 벽에 걸린 그림을 훑어보고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는지를 듣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아마도 젊은 시절부터 좀 유별났던 관심과 취향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때론, 생뚱맞음의 시각이 스님의 죽비처럼 등짝을 후려칠 때가 있기도 하다. 이럴 때 성찰과 세심한 관찰의 시각을 갖게 된다.
앉자마자 눈에 띄는 것이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포함, 다소 도발적이고 에로틱한 그림 3점이 나란히 벽에 걸려있다. 어느 주점, 카페, 등에서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다. 사실 실레의 그림은 벽에 걸어 놓는다는 것은 대중의 취향을 고려할 때 좀 어색하고 거리감이 생기는데, - 물론 나만의 편견일 수 있지만 - 대담하고 용감하게? 걸어 놓았다. 알고 보니 카페 여주인이 미대를 나왔고, 에곤 실레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했다.
한참을 바라보는 가운데 굳어 있는 나의 고정관념의 정수리에 죽비를 맞은 느낌이 들었다. 차를 마시는 내내 과거의 익숙해진 선입견과 편견, 깨지고 부수어지지 않고 내재 되어있는 내 사고의 틀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고 했던 마야콥스키의 말이 또다시 내 머리를 때리고 있었다. 그렇다. 대중의 취향, 너무나 익숙해지고 습관화된, 그래서 카페 벽에 걸린 에로틱한 춘화의 그림을 보고 다소 의아하게 생각한 필자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신라 시대의 토우를 비롯해 특히, 혜원의 에로티시즘은 성리학이 근간인 조선 사회의 엄숙주의(rigorism)에 도전하는 아방가르드의 춘화(春畫)였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동양 풍속화에서 여성의 관능성은 은근함 속 드러냄이다. 직설적이기보다 한 걸음 늦춘 여유로움의 사고방식이다. 그런데 혜원의 춘화는 현대의 포르노를 방불케 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그리고 거리낌도 없이 그의 모든 그림에 ‘惠園(혜원)’이라는 낙관을 당당하게 찍었다. 에곤 실레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로 도발적이다. 숨김도 가림도 없이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듯 지금껏 보아왔던 보일락 말락, 닫힐 듯 열릴 듯한 성적묘사의 정서와 대비되어 화끈하게 보여주는 실레의 작품에서는 지난 시대의 감춤을 드러내고, 고정관념의 성 담론을 탈피하고픈, 그래서 숨기고, 가리고, 왜곡할 때 그것은 본질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알기에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짧은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측면에서 실레의 그림은 미적인 측면보다는 우리가 금기시했던 성적인 욕정 등을 팽팽한 긴장감과 솔직함으로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음에 오히려 주목하고 있다.
뒤돌아보면, 자연물의 형상을 빗댄 ‘남근(男根)’과 ‘여근(女根)’, 그리고 신라 시대 원효대사의 ‘몰가부가(沒柯斧歌)’, 고려 시대의 ‘쌍화점’, 조선 시대의 양반사대부인 송강 정철의 기생 진옥에 대한 ‘시조’와 조선 시대의 혜원 신윤복의 에로틱한 춘화까지 고대 시가 작품에 나타난 성은 생식을 위한 수단에서부터 향락적이고 문란한 성생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관음증(voyeurism) 등을 우린 이미 배우고, 보고 들어왔었다.
그리고 개인의 쾌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꾸준히 향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 장르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성리학이라는 큰 줄기인 직류적 흐름을 벗어나 외곽지역에서 어긋나며 새로움을 파생시키는 혜원과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활동한 실레, 그들이 시대의 주류적인 예술의 담론과 맞서 자신만의 개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그 거대 담론을 이탈하는 것만이 아니라 또 다른 방향과 뒤섞음으로써 획일화된 장르와 대결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림은 많고 명화(名畫)도 많다. 중요한 것은 표준 명화가 따로 있고 언저리 그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높고, 낮고, 중심과 변두리 등의 차별적인 계급장을 떼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춘화 또한 그렇게 봐야 할 이유다.
혜원의 <건곤일회도(乾坤一會圖)>와 실레의 <포옹 Embrace>을 보면 너와 내가 만나 하나가 되어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모를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꿈속에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는 포옹의 순간임을 느낄 수 있다. 이 둘의 엉킴보다 더 좋은 게 있을까…?
포옹*
무엇이 필요하랴.
이 좋은 사람 외에
무엇이 더 좋을까.
이 둘의 엉킴보다
무엇이 만족게 하리
둘이서 하나인데
감미로운 포옹에
도취 된 황홀
수식어는 소음이다.
「졸시」
*Egon Schiele, <Embrace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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