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85

독서의 노를 저어요/홍영수

바다의 표면은 얕은 호흡으로 잔잔해요 내면의 수심엔 깨어나지 못한 의식이 고요하고요 활자를 실은 낯선 배가 다가와 어제와 다른 풍랑의 그물을 가슴팍에 던져요 언어의 작살은 그물망 속 어둠과 무지의 심장을 꿰뚫고요 단어의 삿대는 파도를 떼미는 상징이 되어 얄따란 생각의 조직망을 밧줄로 얽혀줘요 문장의 뉘누리에 휩쓸린 넋 잃은 생각과 행간의 의미는 물머리를 헤쳐가며 항해를 하고요 마룻줄에 매달린 글자의 닻을 내리면 사유의 파편들이 해저를 자맥질하다 떠올라요 지적 갈망이 이물과 고물에 해일처럼 밀려올 때는 망망대해로 독서의 노를 저어가요 돛을 높이 올리고 해적선의 수부가 되어 활자의 그물에 걸린 사유의 보물들을 노략질하고요 저자와 독자의 두 물굽이에서는 설익은 항해일지에 밑줄그으며 난반사로 비추는 물음표의 빛..

나의 시 2022.10.31

대흥사 숲길/홍영수

숲길에 들어서면 달짝지근한 숲 향, 귀 고막을 울리는 새소리에 취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 나를 버리고 숲의 숲이 되어야 비로소 참나로 깨어나게 하는 숲 아홉 굽이 흐르는 개울물 소리를 휘어잡고서 바람은 일필휘지로 골짜기를 가르고 명지바람에 다디단 숲 냄새가 발묵 스르륵 나뭇가지로 번질 무렵 이파리 사이로 보인 구름 화선지 가녘으로 항적운이 스민다. 걸음걸음 위에 화두처럼 툭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 깨닫지 못한 심연에 물음표가 되어 구새 먹은 얼혼을 깨우고 영육에 슬어놓았던 먼지 알갱이들 시냇물에 씻어 보내며 주렁주렁 매단 산새들의 음표 데려다 놓고 솜털 구름 베개 삼아 실카장 눕는다. 깜박 든 풋잠, 깨어보니 일지암의 다향이 코끝을 스친다.

나의 시 2022.10.14

논배미의 논이 되어

벼 이삭들이 나울나울한 굼깊은 다랑이논. 논바닥에 엎드린 우렁이처럼 낮은 자세로 논배미의 논이 되어 생의 퇴적층을 경작지에 쌓아 올린 아버지 장딴지 근육의 피돌기로 알알이 여물어간다. 헤살부린 가뭄과 태풍이 삽자루 손잡이에 절망으로 잡힐 때도 먹구름에 습기 머금은 농심을 적시고 불어오는 바람에 수심(愁心)을 날려 보내면 벼 이삭은 메뚜기 겹눈에 아롱지며 익어간다. 농주 한 잔의 우정에 눈치 빠른 허수아비가 옷매무새 다잡으면 놀란 참새 떼들 미처 앉지 못하고 날갯짓에 낟알 몇 개 떨어질 때 하늬바람에 실려 온 시월의 안부가 굽은 논두렁의 등뼈에 인사를 한다. 햇볕의 무게에 벼 이삭이 고개 숙일수록 농부는 가벼운 마음으로 볏단을 올려다보며 모처럼 웃는 입가에 쌀 몇 섬 걸릴 때 누런 가을 몇 마지기가 쿡쿡 ..

나의 시 2022.10.14

어머니의 눈물 / 홍영수

어머니는 눈물샘이 보이지 않는다.솟구치는 순간 흔적이 없어지기 때문이다.눈물이랑에도 눈물 자국이 없다눈물이 아니라 안고 있는 상처이기 때문이다.눈물방울은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다.행여 씨앗이 되어 발아될까 봐몰래 훔친 눈물엔 진자리가 고이고눈물로 적시는 일생의 삶 앞에자식의 손가락 마디마디엔 아픔이 새겨져 있고보이지 않는 눈물은 가슴에 웅크리고 있다.그것은 사랑이고 배려다순수의 뉘우침이고 회한이다.신은 왜 평생 속울음으로만 온몸 적시는 눈물샘을 주셨을까언제나 못 볼 걸 본 것처럼돌아서 눈물 훔치셨던 어머니.눈물이 핏방울이고 땀방울임을 아는 순간어머니! 당신의 눈물은 햇귀에 비친 해울입니다.슬픔은 눈물로 이겨낼 수 없다는 콸콸 쏟는 눈물의 가르침입니다.어머니의 눈물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을 버린 눈물이기 때문..

나의 시 2022.10.13

The Broken Column(부서진 기둥)*

아프다는 말은 하지 말자 고통스러움에 대해서도 침묵하자 황량한 벌판 너머 죽음의 그림자 다가오고 대못 박힌 젖무덤에서 젖이 나오리라는 것도 앙가슴 사이에 세운 부서진 기둥 척추 삼아 똑바로 서서 살아가는 것도 이 여자 앞에서는 입시울을 닫자. 정면을 응시하며 흐르는 눈물 속엔 한 여자의 삶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 *Frida Kahlo 작품 Frida Kahlo, Mexico, The Broken Column, 1944.

나의 시 2022.10.13

광장*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넋 나간 유령이 되어 한 알 한 알 감정을 떨어뜨리며 미라가 미로를 헤매고 있다. 무게와 부피와 육신의 껍데기마저 벗어놓고 기름기 빠진 관절로 작대기 되어 서 있다.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발의 무게는 덜어내지 않고 한 줄기 고독을 뛰어넘어 유능한 영혼들이 걷고 있다. * Alberto Giacometti . 알베르토 자코메티 . 24×63.5×43cm. 개인소장

나의 시 2022.10.13

부부 찌개/홍영수

곰삭은 시골 된장 한 숟갈 푹 떠서 사뿐히 건네면 다정스레 받은 당신 발효된 그 고마움 한 덩이 풀어 넣고 냉동실에서 꺼낸 멸치 몇 개 당신 손에 쥐여 주면 똥 뺀 멸치 빈속에 두터운 믿음으로 꽉 채우고 베란다에서 감자 두 개 가져오면 조심스레 건넨 칼로 껍질 벗기면서 서로의 얄미움도 확 벗겨버리고 버섯 씻다 젖은 손을 일광욕시킨 마른행주로 살며시 닦아주니 미운 정 한 송이 햇살 되어 손등에서 피어오르고 매웠던 시집살이 청양고추와 함께 툭 끊어 끓는 국물에 슬몃 얹히고 갑작스러운 볼 뽀뽀에 붉어진 낯빛은 고추장에 버무려서 속살처럼 하얀 당신 마음과 함께 두부 넣어 한소끔 끓이고 한두 겹 벗긴 양파의 매끈함에 신혼 때 생각 몇 방울 떨어뜨려 마주 보는 뜨거운 눈빛으로 보글보글 끓인다. -----------..

나의 시 2022.10.13

몽땅 빗자루/홍영수

깔끔한 툇마루 끝에쓸어 담다 닳고 닳아 시린 아픔 하나 있다.녹슨 못에 걸려 있는 때 묻은 손잡이엔부엌 문지방 넘나들던 엄마의지문 자국이 흐릿하다. 비바람 알갱이로 슬어 놓은 먼지와자신의 온몸 닳아가며 남긴 티끌은절반을 먼저 보내고 남은반 토막의 경전. 뒷바라지를 치마로 두르고엄마를 저고리로 껴입은 채허리 한 번 펴지 못하다지팡이 손잡이처럼절반으로 굽어 버린 기역자의 법열 등. 서로 다독이며좀먹은 마루판 사이를헐벗고 닳아가면서 비질하고 있다.누군가 밟고 디뎌야 할마룻바닥의 티를 티 나지 않게 쓸고 있다.--------------------------------시골에 있는 '몽땅빗자루' /홍영수.  2016/07/22

나의 시 2022.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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