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논배미의 논이 되어

홍영수 시인(jisrak) 2022. 10. 1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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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 이삭들이 나울나울한 굼깊은 다랑이논.

논바닥에 엎드린 우렁이처럼

낮은 자세로 논배미의 논이 되어

생의 퇴적층을 경작지에 쌓아 올린 아버지

장딴지 근육의 피돌기로 알알이 여물어간다.

 

헤살부린 가뭄과 태풍이

삽자루 손잡이에 절망으로 잡힐 때도

먹구름에 습기 머금은 농심을 적시고

불어오는 바람에 수심(愁心)을 날려 보내면

벼 이삭은 메뚜기 겹눈에 아롱지며 익어간다.

 

농주 한 잔의 우정에

눈치 빠른 허수아비가 옷매무새 다잡으면

놀란 참새 떼들 미처 앉지 못하고

날갯짓에 낟알 몇 개 떨어질 때

하늬바람에 실려 온 시월의 안부가

굽은 논두렁의 등뼈에 인사를 한다.

 

햇볕의 무게에 벼 이삭이 고개 숙일수록

농부는 가벼운 마음으로 볏단을 올려다보며

모처럼 웃는 입가에 쌀 몇 섬 걸릴 때

누런 가을 몇 마지기가

쿡쿡 쑤신 아버지의 삭신을 꾹꾹 주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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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수상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수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1회 황토현 문학상 수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수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수상

시집 『흔적의 꽃』, 시산맥사, 2017.

이메일 jisrak@hanmail.net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다랑이 논'  . 2008/11/08    사진 홍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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