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평론 32

보령 바다는 노을로 말한다 / 황주현

처음 내게, 보령 바다는 말이 없었다. 그 먼 길을 달려와 마주한 보령 바다는 한 자락의 푸른 옷깃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파도가 섬 한 채를 풀었다가 조였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 수평선은 한 줄의 단호한 문장으로 길게 누워 있을 뿐이었다 읽어 낼 수 없는 바다의 안부 말수 적은 아버지 같았다 어둑한 저녁의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와 구석진 마당가에 빈 지게로 우두커니 서서 발 디딜 곳 없는 어둠을 부려 놓곤 했었다 어스름한 저녁의 수평선은 고단한 생의 시작과 끝을 단단하게 결박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할 말들을 알아챈 건 노을이 물든 서해 바다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아버지의 삶도 저토록 붉고 찬란하게 타오르고 싶었을까. 다시 잿빛으로 타다 남은 검붉은 밑불로 남아 세상의 바닥을 단 한 ..

나의 시 평론 2023.04.11

나는 언제나 고양이를 기다린다/김충규

고양이로 하여금 쓰레기 봉지를 찢도록 한 것은 생선 찌꺼기의 비린내였나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 봉지를 찢고 있다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떨며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의 눈은 터널처럼 깊고 그 속엔 어둠이 고여 있다 그 어둠을 파내어 내 눈에 바르면 나도 저것처럼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슬픈 아비가 될까 마흔이 내일 모레인데 자식들은 겁도 없이 가시로 내 생을 쿡쿡 찌르며 자란다 아내는 도망치듯 취직을 하고 폐결핵에 걸린 나는 한동안 붉은 객혈을 하다 아침마다 한 줌씩 알약을 먹으며 헉헉거린다 거울을 보면 내 눈빛은 차츰 흐릿해져 간다 손톱으로 거울을 찢고 거울 속의 나를 끄집어내어 눈을 후벼 파고 싶은 나날들 고양이는 쓰레기 봉지를 거침없이 찢어놓고 사라졌다 쓰레기 봉지를 테이프로 봉합하며 너덜거리는 내..

나의 시 평론 2023.03.03

삶이란/김석심

앞만 보며 달려왔던 인생이었지 건강과 얽힌 실타래 푸는 동안 서산에 노을은 짙어만 갔네 어느덧 남편은 한줄기 구름과 바람으로 왔다가 떠나가고 아이들은 자라 제 갈 길 찾았으니 허전한 마음에 뒤돌아보니 출발점은 저 멀리서 몸을 숨기고 종점이 가까워질 때 유일한 내 친구는 문학의 길이라네! 알량하게 쓰는 글이지만 글 한 편이 나의 애인이고 자식이고 친구일세! 유통기한이 없는 글을 쓰고 언제까지 정신력 잃지 않은 삶으로 뜨락에서 피어나는 수채화 같았으면. 시·수필집 『인생의 숲을 통해서』, 해드림출판사, 2021 ---------------------------------------------------------- 최근엔 노년의 삶에 대한 문제가 화두가 되고 있다. ‘에이지즘(ageism)’이라는 말까지 나..

나의 시 평론 2023.02.19

봄소식/김옥동

동구 밖 실천 여는 싱그러움 파고든다 겨우내 텅 빈 가슴 핏기 잃은 산자락들 움트는 박동 소리가 새 기운을 끼얹다. 고드름 낙수 소리 소절(小節)로 띄워 진다 지붕 밑 움츠리다 기지개 켠 토방 마당 부화 된 햇병아리도 물가래만 쪼인다. 화신의 전령들이 이심전심 꿈틀댄다 지난봄 못다했던 소망들이 되새겨 나 고개든 버들강아지 파란 꿈만 그린다. 시조 시집 『두메산골』 ----------------------- 시조는 三章六句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章과 句의 다양한 변형을 주어 멋스러움을 추구하는데 단시조든 연시조든 행갈이 등을 통해 다채로운 운율의 묘미를 살려 시조의 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조의 기본 틀인 3장 6구는 시조의 골격이고 구성법이다. 그리고 기승전결에 의해 짜인다. 그..

나의 시 평론 2023.02.17

산길을 걷다가/황상희

산길을 걷다가 울퉁불퉁 드러난 벚나무 뿌리를 본다 가장 아픈 기억의 흔적처럼 드러난 상처 다발로 송두리째 뻗어 있다 그래도 땅속에서 뿌리를 깊이 박은 나무처럼 살고 싶다고 살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땅과 하늘의 경계에서 바위틈 사이를 비집고 당당히 서 있는 벚나무 마지막 기운이 다할 때도 저렇게 자기를 버티고 서 있는 나무 죽음을 앞에 두고도 영혼의 길이 되어주는 뿌리 잠시 신발을 벗어놓고 나갔다 돌아온 주인처럼 해마다 새싹이 돋아 넉넉하게 그늘을 품어주던 나무 시집 「귀의 말」, 시산맥사, 2018. -------------------------------------- 문학은 정서와 감정에 바탕을 둔다. 문학작품은 작가의 의도대로 익혀야 하는 ‘의도적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되지만 독자의 멋대로 해석하는 ‘..

나의 시 평론 2023.02.10

꿈의 퍼즐/홍명근

살다 보니 열망과 갈등의 순간 위에 오래 머물고 머물러보니 기다림은 시곗바늘을 흔든다. 초침 따라 달려가던 시절에는 별 하나 꽃 한 송이조차 두근거렸다 이제는 꽃이 피어도 별이 반짝여도 설레임 희미하지만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이 겹쳐 만난 인연은 실타래처럼 길다. 실매듭을 풀어 나무가 기둥처럼 자라는 언덕에 둥지를 틀고 학이 되어 바라보는 길 끝에 담쟁이 넝쿨 한 겹 더 두른 너는 또 하나의 울타리. 살아가는 것이 순간이 쌓여 가는 머무름이고 머무름이 깊어져 가면 길이 되는 것일까 별 모양의 담쟁이 잎 넝쿨 너머 꽃 같은 저 무지개는 열정을 향해 여전히 손짓하고 있다. 시집 『꿈의 퍼즐』, 미디어 저널, 2019. 그렇다. 느리게 움직이는 시침, 분침보다는 1초라는 짧은 순간을 소리 내며 똑딱이는 모습은..

나의 시 평론 2023.02.03

엄마가 치매야/이재학

18 치매로 정신이 없어도 아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여-전-히 밤을 지키며 아들을 기다리는 울 엄마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기억력이 쇠퇴해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뚜렷했던 기억이 점점 희미해져 간다. 더구나 생각이 날 듯 말 듯한 지난 일들은 기억에서 점점 멀어져 간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좋지 않은 감정의 강렬한 흔적이나 뇌 속에 간직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는다. 그래서 망각의 기술이 필요하다. 지난 일의 개인적 경험이나 특히 부정적인 경험이 머릿속에 남겨져 있는 이러한 기억의 흔적을 생리학에서는 엔그램(engram)이라 한다. 한 마디로 ‘기억의 세포’, 또는 ‘기억의 흔적’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흔히 우리가 일컫는 노인성 질환의 대표 격인‘치매’증상이 있으시다. 치매의 질..

나의 시 평론 2023.01.27

운필運筆/박용섭

가뭄이 길었던 해 아버지 가슴도 논바닥처럼 타고 있었다 비단실 같은 빗줄기 촉촉하니 쟁기를 지고 멍에 메워 큰 소를 앞세우고 논으로 가신다 쉬는 시간이 되면 농주 한 사발 소에게 먼저 권하며 힘들지 해 그림자에 비치는 논고랑은 예서체를 펼쳐놓은 것 같다 모를 심는 것은 내 몫이 아닌 것을 눈물이라도 찔끔 고이면 행서체로 내가 써레질해야지. 시집 『내 책상에는 옹이가 많다』, 산과들, 2018. 한 가뭄에 타는 논바닥, 갈라 터지고 흙먼지 일으키는 논밭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은 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무너지는 것이다. 엷은 홑바지를 입은 아버지와 헐렁한 몸빼를 입은 어머니가 일구는 농사철, 알바도, 시간제 근무도 없었던 시절엔 곡식 한 알, 채소 한 포기는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었다. 예전에 산골 다랑..

나의 시 평론 2023.01.17

광고/김원준

미친 사람 찾습니다. 통역할 사람 필요 없이 둘이 서로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정말 완전해야 합니다 적당히 미쳐서는 안 됩니다 도통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아주 아주 슬픕니다 돈이랑 가정은 없어도 좋고 완전히 미친 사람이면 아무라도 좋습니다 옆에 그런 사람 없나요 알맹인 쏙 빠지고 얄궂은 것만 득실대는 처먹고 똥만 만드는 내일 없는 녀석들은 필요 없소 정신 똑바로 확실히 미친 사람 만나 까부치고 밤새워 한 잔 미시고 싶습니다 미친 장부가 마시는 한 잔 술은 천년을 쌓고 미친 장부가 마시는 한 잔 술은 만년을 염려하며 미친 장부가 마시는 한 잔 술은 지기를 만난 축배입니다. 시집 『이런 사람 찾습니다 』, 산과 들, 2014 ----------------------------------------------..

나의 시 평론 2023.01.10

일천 개의 鏡/양성수

큰스님 선문답하듯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말하지 말라 산속에 물 있고 물속에 산 있느니 보이는 대로 보려 하지 말고 생각되는 대로 생각하려 하지 말라 보여지는 생각되어지는 것들은 얼룩진 거울 속에 비친 네 마음이려니 산에서 물을 물에서 산을 보라 산과 물은 태초부터 하나였음을 알게 되리니 디카시집 『자네 밥은 먹고 다니시는가』, 산과들, 2018 -----------------------------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물론 성철 스님 때문에 그렇지만 이미 선불교의 화두로 백운선사나 경봉 스님이 즐겨 썼던 말이다. 물론 ‘청원 유신(靑原 惟信)’선사가 처음 했던 말이다. 참선에 몰입한 그는 30년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높..

나의 시 평론 202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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