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평론 32

페르소나/박선희

병원 1층 로비 띄엄띄엄 환자들 모여 앉았다 박수소리에 섞인 웃음소리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껑충 키 큰 남자 우스워 죽겠다는 듯 허리를 꺾었다 편다 노란 꽃 달린 머리띠를 하고 목에는 청진기를 걸고 뱅글뱅글 눈알이 그려진 안경을 쓰고 완강히 닫힌 문처럼 결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을 소리만 요란한 얼굴들 몇 차례 시키는 대로 따라 웃더니 움찔, 굳은 표정이 풀린다 억지로 웃었던 웃음인데 서서히 허물처럼 벗겨진 가면 웃음은 가면으로부터 얼굴을 꺼내는 일 웃음의 힘은 무섭다 치매는 앓는 아버지, 요양에 두고 급히 돌아 선 등으로 억지웃음을 시키며 웃음을 삼킨 웃음 치료사 오늘도 가면을 쓰고 산다. 시집 , 현대시학, 2016 --------------------------- 문학회 기행에서 하회마을에 갔을 때‘..

나의 시 평론 2023.01.02

사랑이 예약된 당일 아침/유부식

아침 공기가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재즈의 선율이 내 온몸을 휘감는다. 그녀의 고운 얼굴을 떠올리고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그려보고 저녁에 만나는 순간까지 풍선처럼 부풀고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나와 그 순간이 약속된 이여! 나와 하나 되기로 선약된 이여! 사랑은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그 순간에 가장 빛난다는 죽어서도 잊지는 말자 사랑하는 내 여인이여 시집 「카카오 스토리」, 산과들, 2014 ---------------------- 시라는 장르 자체가 다의성과 시인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몫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시제의 의미는 결혼하는 날을 의미한 것으로 읽히지만 다른 방향으로도 읽힐 수 있음은 물론이다. 남녀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고 가슴 벅찬 일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이든 젊은 남녀 간의..

나의 시 평론 2022.12.29

물거울/양정동

물거울/양정동 실바람이 간간히 스쳐가는 연못 위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이 떠간다. 소나무 가지를 타고 참새가 연못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내 얼굴을 호수가 보고 있어 내 마음도 보려고 손 컵으로 물을 뜨니 찡그린 표정으로 조용히 두고 보라 한다. 마음은 조용히 보는 것이라고. ------------------------------------- 조용한 연못을 스치는 실바람 소리에서도 작곡가는 시의 리듬을 들을 수 있고, 파란 하늘에 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고 한 줄의 시를 띄울 수 있고, 또한 라흐마니노프의 세속적인 합창 교향곡의‘종’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복음을 생각하고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다. 거울처럼 맑은 연못, 바로 옆 소나무 가지를 오락가락하며 뛰어노는 참새 떼가 물속에 투영..

나의 시 평론 2022.12.27

경계境界/김경식

수덕사修德寺 가는 길 난데없는 겨울 소나기라니, 일주문에 서서 비를 긋는다 산중엔 따로 울을 두르지 않느니 문안의 비와 문 밖의 비가 다르지 않아 바람은 빗물 따라 산을 내려가고 어둔 귀 하나 문설주에 기대어 저녁 법고소리를 기다리고 있다 시집『적막한 말』 ------------------------------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갈 때 첫 번째 세워진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다고 해서 일주문이라고 부른다. 가람에 문은 문짝이 없다. 문은 공간 분할만하고 상징적일 뿐이다. 그리고 주변엔 울(담장)도 없다. 산중 사찰은 대부분 개방적이다. 불교는 오고 감에 자유자재 한다. 부처님을 여래라고 부르는 것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속세의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모아 한 마음으로 통하는 진리의 세계로 향하..

나의 시 평론 2022.12.24

마음의 무게/임내영

몸이 아프면 솔직해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욕심이 생겨 악다구니로 버텼는가 싶다가도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해 나중에 전부 포기하게 되고 그 다음에 마음이 가벼워진다 죽지 못해 모든 걸 내려놓기보다는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을 하면 아플 때 무게가 줄어들겠지 걱정 한 줌 꽃씨처럼 날려 버린다 시집 -------------------------------- 千尺絲綸直下垂 천척 사륜직 하수 一波纔動萬波隨 일파 재동 만파수 夜靜水寒魚不食 야정수 한어 불식 滿船空載月明歸 만선 공재 월명 귀 천 길 물 밑에 낚시 줄을 곧게 드리우니 한 물결이 일렁이자 만 물결이 따라 이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차가워 물고기는 물지 않고 빈 배에 달빛 가득 싣고 돌아오네. -冶父道川 禪師- --------------------------..

나의 시 평론 2022.12.24

엄마의 가을/김옥순

틀니를 두고 놀러 나갔다 종일을 잇몸으로 살고 저녁 식탁에도 잇몸으로 앉는다 공원에 간다고 부채는 한 보따리 챙기고 옷은 반소매 위에 가을옷 모자 밑으로 땀방울이 주르르 염색은 아흔여섯까지 하겠다더니 아직 아흔셋인데 말이 없다 밥을 한 끼니도 안 먹었다고 난처하게 하고, 꼭 챙기던 용돈도 이제는 챙기지 않는다. 시집 . ---------------------------- ‘엄마의 가을’ 詩題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여성은 생물학적 性이다. 여성과 남성 외에 또 하나의 性을 정의 하고 싶다면 필자는 당연히‘엄마의 性’, 즉 ‘母性’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의된 여자로서의 성이 아닌 모성은 여자의 성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 한정시킬 수 없는 ‘엄마의 성’이다. 어쩜 모성이라는 말 그 자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시 평론 2022.11.29

마당을 쓸며/박미현

촛불이 타고 있는 새벽 산사 빈 마당에 비질을 한다 젊은 스님이 다가와 무얼 쓸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무엇을 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쓸고 있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멋쩍게 대답을 한다 비질을 할 때마다 잔돌이거나 박힌 잎이거나 흙먼지거나가 벌떡, 벌떡 일어선다 백팔번뇌가 십팔번 뇌로 떠오르던 법당! 비질이 지나간 자리마다 죽비를 맞은 것 같다 시집 --------------------------------- 부처가 성불하고 맨 처음 가르친 것이 바로 네 가지 진리와 여덟 겹의 길이다. ‘苦集滅道’와‘八正道’이다. 고집멸도의 네 가지 진리란 우리의 삶은 괴롭고. 그 괴로움은 집착에서 오고, 그 집착을 끊어야 할 길, 그게 바로 팔정도이다. 어쩜 시인은 속애(俗埃)에 지친 삶의 괴로움과 번뇌의 일상..

나의 시 평론 2022.11.28

구멍/구정혜

썰물이 나간 사이 갯벌에 크고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작은 게 한 마리 찰진 흙 온몸에 뒤집어쓰고 구멍을 파고 있다 산다는 것은 구멍을 내는 일 구멍만큼이나 자기 세상이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완벽을 노력했지만 내 마음 뒤집어 보면 곳곳에 구멍 투성이다. 그곳으로 바람도 들어오고 햇볕도 파고들고 친구도 왔다 간다 더러는 달도 제 짝인 듯 넌지시 맞춰 보는 _ 芝堂 구정혜 시인 -------------------------- 필자는 겨울 바다를 좋아한다. 이유는 없다. 다만, 북적거리는 여름 해변보다는 한적해서 홀로 걸으며 썰물 때 드러난 갯벌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들, 날아든 조류들, ‘드러냄과 들어옴’의 드나듦을 볼 수 있어서 좋다. 시인은 썰물의 갯벌에서 게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고 있다. 작은 집게발로..

나의 시 평론 2022.11.25

쉰이 넘어서야 강을 보았습니다/금미자

대책 없이 밀려 밀려온 여기 세상이 잠시 숨을 죽입니다 세찬 바람이 가슴을 휘몰아 간 오후 지금은 맑고 조용합니다 노송 한 그루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장작을 패고 따뜻하게 쌓는 일 구수한 밥 냄새에 뭉근한 기다림을 배웁니다 황망히 떠나버린 시간속의 사람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정표를 잃은 내가 서있고 또 다시 바람이 일렁입니다. 이제 내 마음에도 성근 볕이 들고 분주했던 시간들이 차례차례 줄을 섭니다 쉰 고개 넘어, 이제야 나는 강을 보았습니다 넉넉함으로 나를 푸근히 안고 느릿느릿 바다로 함께 갈 강을 만났습니다. _금미자 시인 -------------------------------- 여행이란 익숙한 것에서 낯선 곳으로 떠남이다. 삶의 여정 또한 이렇다고 할 때 태어난 순간부터 수없이 많은 마주침 ..

나의 시 평론 2022.11.17

허난설헌/이가은

깊은 밤 규원가에 문풍지 우는 소리 일찍이 능한 시문詩文 치마 두른 원죄 앞에 부용꽃 서늘한 이마 돌아서서 지우고 난蘭 곁에 다소곳한 버들가지 하얀 송이 가을날 우뚝 솟은 연꽃 같은 노래마저 진흙 벌 캄캄한 속을 뿌리내리지 못하고 골안개 자오록이 온몸으로 젖는 날은 뼈끝으로 새긴 곡자* 삼구홍타* 예감하고 불살라 거두었던 시혼 먼 땅에서 빛나고… *곡자(哭子) : ‘두 자녀의 죽음에 울며’라는 시 *삼구홍타(三九紅墮) : 난설헌이 지은 「夢遊鑛桑山詩」에서 스물일곱 송이 꽃이 붉게 떨어지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본인이 죽을 것을 암시한 시. _이가은 시조시인 ---------------------------------------- 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 특히 현대 시조는 고유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서 그 ..

나의 시 평론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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