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문학 칼럼 99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지 않은가? (不過一枝)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그 무언가를 추구한다. 돈과 명예, 권력, 장수 등등. 그렇지만 인간의 생명이란 유한한 것이기에 삶의 무한함이란 없다. 그런데도 천년 백 년 살 것처럼 욕망하면서 살아간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유적인 삶보다는 ‘나는 누구일까?’라는 의문과 질문을 품은 존재적 삶이 필요하다. 산을 오르거나 숲길을 걸을 때, 가끔 새의 둥지를 본다. 특히, 작은 새들은 자그마한 나뭇가지, 또는 대숲의 작은 가지에 둥지를 틀고 알을 부화시켜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할 때면 장자의 소요유逍遙遊에 나온 요 임금과 허유의 얘기가 떠오른다. 요堯 임금이 허유許由에게 천하를 물려주려고 할 때, 허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뱁새가 깊은 숲속에 둥지를 짓고 살 때 나뭇가지 하나..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다(一卽多, 多卽一)

보슬보슬 봄비가 잎을 떨구고 난 가녀린 나뭇가지 끝에 맺혀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다. ‘비꽃’이다. 칼릴 지브란이 ‘이슬방울’에서 바다의 비밀을 알아내듯, 비꽃 방울은 다른 방울과 주변의 나뭇가지를 안고 있고, 또 다른 비꽃의 방울 속에도 마찬가지로 서로에게 안기고, 서로를 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슷한 예로, 백화점이나 때론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사방이 유리로 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서 있는 나를 볼 때 사방으로 반사되어 비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화엄 세계를 상징하는 相卽, 相入을 떠올리고 또한, ‘화엄경’에 나오는 ‘인드라망(帝釋網)’의 비유를 함께 생각하게 한다. 하나의 보석이 모든 보석에, 모든 보석은 하나의 보석에 있다는 ‘일중다, 다중일.( 一卽多, 多..

관곡지에서 만난 잭슨 폴록

어느 해 늦가을, 우리나라 최초의 蓮 시배지인 시흥시의 관곡지에 갔다. 하늘대는 연잎과 연꽃향은 초겨울로 접어들면서 이미 생명을 다했다. 오히려 이러한 풍경에 시선이 더 쏠리면서 많은 걸 생각게 한다. 필자는 오색단풍이 찬연한 풍경보다는 가을이 끝날 무렵 11월 중순쯤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저물어가고, 사그라지며 무너져가는 절정의 뒤안길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절정의 본질이 남겨 놓은 흔적을 더듬어 찾기 위해서이다. 홀로 서서 늦가을의 연지를 바라보는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잭슨 폴록이 떠 올랐다. 그 이유는, 한여름 연지의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연잎과 연잎을 키워 올리는 연대, 연꽃의 향기 등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의 정절이 남긴 흔적, 말라비틀어진 연잎은 바닥에 엎드려 있..

절절한 사랑의 공감체험―팰리스 곤잘레스-토레스

형형색색의 빛으로 불을 밝히는 저녁이다. 하늘을 치솟는 거대한 마천루의 위엄 앞에 짓눌린 사람들, 그들의 영혼은 넝마처럼 찢기고 흩어지기도 한다.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름의 문명 앞에 맥없이 걷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희망을 잃고 길을 잃은 듯 방황을 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러한 서울의 중심인 명동 중앙우체국 옆의 빌딩들 사이에 옥외광고판이 눈에 띄었다. 침대나 이불광고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문구나 이름이 없다. 새로 출시된 상품이라면 회사의 이름이 그리고 광고의 카피가 있을 텐데 없었다. 침대 사진에는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베개 두 개가 놓여있고 누군지 모른 두 사람이 함께 누웠다가 방금 일어난 흔적으로 걸려있었다. 이 작품은 다름이 아닌 쿠바 태생의 미국 현대 미술가 ‘팰릭스 곤잘레스-토레스..

사랑의 감정/홍영수

도심 속 카페에서 홀로 앉아 차를 마실 때가 있다. 눈 들어 거리를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그들을 무심코 바라볼 때가 있다. 그냥 스치는 풍경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예전 이성의 친구를 보는 듯하고 또는, 평소 바랬던 이상형이 눈에 확 들어올 때도 있다. 이처럼 샤를 보들레르에게는 도심 속 군중의 누군가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시가 있다. 『악의 꽃』 중에 「지나가는 여인에게」 의 시다. 시의 일부를 보자. (上略) “날렵하고 의젓하게, 조각 같은 그 다리로, 나는 마셨다, 실성한 사람처럼 몸을 떨며, 태풍이 싹트는 창백한 하늘, 그녀의 눈에서, 마음 녹이는 달콤함, 뇌쇄적인 쾌락을.” (下略) “실성한 사람처럼 몸을 떨며”, “얼을 빼는 감미로움과 애를 태우는 쾌락을” 등을 보면 도시의 인파 속에서 스치듯..

홍랑(洪娘), 해어화(解語花)의 그 지독한 사랑

몸은 천민이요, 눈은 양반’이라는 말처럼 이중적 신분 구조에 처했던 그들(妓生), 조선 시대 여성문화의 중심에 서 있었으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면서 예능적인 면은 평가 절하되고 娼妓(창기)와 동일 개념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시서화에 능한 예술인으로서 사회적 자리매김을 받아야 마땅한 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본연의 의미를 상실한 채 왜곡된 성(性) 상품으로 이 시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 조선의 로는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이매창, 그리고 성천의 김부용을 꼽고 있으나 ‘홍랑(洪娘)’ 또한 이들에 비해 詩妓로서는 빠질 수 없는 기녀가 아닌가 한다. 그녀들의 예술적 행위는 지금도 무형 문화재로서 자리하고 있으며, 당시 전문 예인인 만능 엔터네이너로서의 그들을 일반적 호칭인‘기생妓生’이..

문학과 음악에서의 달, 정읍사井邑詞와 루살카Rusalka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학과 예술은 그 분야의 고유한 언어와 다양한 표현 수단을 통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 속에 넓이와 깊이의 가능성을 확대 및 재생산해 왔다. 최근엔 학문과 예술간 경계를 융복합하고 해체하는 일이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실 상호 관계망을 확대하고 시각을 넓혀가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시대적 과제이고 요청인지도 모른다. 문학과 음악,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보듯이 오랜 역사 역사만큼이나 전통적으로 계승 발전해 왔다. 문학의 상상력은 작곡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다. 베토벤 교향곡 9번에 ‘쉴러의 시 ‘환희에 붙여’를 삽입했고, 빌 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 시를 슈베르트가 노래하듯이. 좀 다른 방향이지만, 백제 시대 가요인 ‘정읍사’와 체..

기다림과 떠남의 변주곡, 황진이와 슈베르트

문학과 예술은 아주 매혹적이다. 그 이유는 일상적인 삶과는 다르게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학과 예술세계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열린 사고와 감수성, 선지식보다는 틀에 박힌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문학의 깊이와 예술적 가치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에서 마시는 한 잔의 감흥과 어디서 들려오는 한 모금의 음악, 그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가. 이처럼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주는 게 문학과 음악이다. 새소리와 꽃잎 떨어지는 소리가 음악적 요소로 다가오듯, 문학 또한 그러한 소리 너머의 보이지도 들을 수도 없는 것에서 시인은 시혼을 일깨우고 프시케의 외침이 들린다. 이 엄동설한에 황진이의 ‘동짓달 기나긴 밤’과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에서 뮤즈를 ..

아르카익 미소와 서산 마애삼존불

인간은 본래 호모 에스테티쿠스 즉, ‘예술적 인간((homo estheticus)이면서,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다. 그래서일까 예술과 종교는 긴밀히 교차하고 융합하면서 긴 예술 역사의 흐름을 형성해 왔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인간은 삶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과 우주적, 영적인 그 무엇과 교신하고 공유하기도 한다. 동물의 갇힌 세계와는 달리 열린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술의 원천은 종교적 경험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종교의례 중에 춤과 노래, 그림 등, 그리고 주술적인 것들에 대한 이미지에 대응하는 한 방식으로 잉태된 것이 예술이기도 하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예술과 종교의 양태상의 차이를 밝힘과 동시에 “예술적 의식과 ..

멕시코 페미니즘의 초상(肖像), 프리다 칼로

여성의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19기 산업혁명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의 성에 대한 차별은 다양한 분야에서 꾸준히 진행해 왔다.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를 발간해서 사회적인 여성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페미니즘 논쟁을 촉발했다. 남성 예술가들보다 여성에게는‘여류화가’,‘여류시인’ 등, ‘여성’이라는 단어를 붙여 지칭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관습적으로 그러한 경향이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여성은 사회적 지위 앞에 성차별적인 생물학적 성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일까. 한 예를 들면, 화가 살바도르 달리가 일기로 쓴 책『나는 천재다』에서 천재 미술가 10명을 선정했다. 그러면서 천재 미술가가 존재하지 않은 이유를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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